부산시 연제구는 몇 년 사이 부산시청 부산지법 부산경찰청이 잇달아 옮겨오면서 부산에서 가장 급격히 변모하고 있는 지역이다. 높이 치솟은 빌딩 사이로 남아있는 납작집이 얼마전까지도 이 지역이 부산에서도 매우 낙후된 지역이었음을 여전히 보여준다. 부산 지하철 시청역에서 1번 마을버스를 타고 황령산쪽으로 올라가면 대비가 더욱 두드러진다. 높은 아파트촌이 어느 결에 끝나는가 싶더니 산자락에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 있는 마을이 나타난다. 집들은 마당도 대문도 없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손바닥만한 현관에 마루나 방이 곧바로 붙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부산시 연제구 연산2동 1통 지역인 이 곳은 산골짜기 이름을 따서 물만골로 불린다. 이 동네에 들어선 집 300여호는 하나같이 무허가 주택이다. 전기는 있지만 수돗물은 들어오지 않아 지하수를 먹고 있다. 전형적인 산동네.그러나 이것은 외형일 뿐 이 동네는 여느 산동네와는 확연히 다르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주택 재개발을 꿈꾸는 공동체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만골공동체'로 스스로를 이름붙인 이들은 이 지역의 땅을 사들여 번듯한 보금자리를 새로 건설할 꿈에 부풀어 있다. 빈민들의 무허가 주택이 들어선 산동네는 강제철거되고 살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시 다른 곳에서 무허가촌을 형성해 살 수밖에 없는 현실속에서 가난한 이들이 이룬 이 공동체의 꿈은 대단해 보인다.
물만골공동체 운영위원회 견대필(44) 위원장은 "무허가촌을 허물고 아파트촌을 만드는 재개발은 부동산 투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지방자치단체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무조건 내몰면 또다시 다른 지역에서 무허가촌을 만들 수밖에 없으며 살던 곳을 떠난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질 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곳에서 보다 인간답게 살도록 주거환경을 바꿔주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 힘으로 이런 마을을 만들어보자고 99년도부터 땅을 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곳에는 현재 450세대 1,211명(2003년 12월말 현재 연산2동사무소 집계)이 살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 350가구가 참여하여 지금까지 사들인 땅은 2만3천여평. 물만골 전체가 8만여평, 집이 들어선 지역을 3만여평으로 추정하니까 집 들어선 자리는 3분의 2 이상을 사들인 것이다. 땅을 가장 많이 산 이는 100평, 가장 적게 산 이는 18평이지만 적게 산 이나 많게 산 이나 이 땅을 멋대로 처분할 수는 없다. 전체 땅을 공동지분으로 했고 팔 때는 공동체에만 팔도록 규약을 만들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땅 사는 데는 돈을 내지 못한 사람들도 함께 생태마을에 입주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할 생각이다.
물만골에는 한국전쟁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 1964년 초량동 부두지구 철거민들이 대거 입주하면서 오늘에 가까운 마을을 형성했다. 무허가 집들이 많아지면서 구청은 철거하려 하고 주민들은 반발하는 밀고당기기가 거듭됐다. 91년의 철거에는 부산 울산 지역의 학생운동권이 빈민운동 차원에서 주민들의 철거저지에 합세, 10일동안의 대치끝에 철거를 막아내기도 했다.
물만골 공동체의 초대운영위원장인 이희찬(42)씨는 바로 이 때 물만골에서 철거저지운동을 편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부산대 경영학과 81학번인 그는 민주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에서 노동특위를 담당하면서 대우조선 노동자 사망사건과 연관되어 피신중 물만골에 정착했다. 당연히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빈민운동도 그의 담당이 되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대기업에 들어가 플랜트 설비수출 담당을 하며 건축기사 자격증도 땄지만 물만골은 떠나지 않았다.
물만골 공동체가 구성된 것은 98년이다. 마을 왼편의 집들을 헐고 4차선 관통도로를 뚫겠다는 시의 방침에 주민들이 맞서면서이다. 도로건설저지비상대책위를 만들었던 주민들은 철거반대만으로는 무허가 빈민촌의 상태를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고 결국 직접 땅을 사들이자는 데까지 이르게 됐다. 다행히 이 곳은 사유지였고 IMF 한파로 땅값이 평당 20만∼30만원으로 떨어져 있었다.
공동체를 통해 땅을 사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이들은 마을 자치운동에도 열심히 나섰다. 당시의 사회분위기에 맞물려 자활사업장도 마련했고 노인들끼리는 청소용역사업을 하기도 했다. 또 일부는 개와 오리를 키우는 공동사업장도 만들었다. 살림이 펴면서 이 같은 공동사업장은 다 사라진 상태. 하지만 그 때를 계기로 시작된 불우이웃 돌보기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부녀회를 중심으로 겨울이면 소년소녀와 독거노인에게 김장을 담가주는 일은 계속하고 있다. 부녀회 회장을 지낸 김복자(65)씨는 "꼭 공동체라서가 아니라 여기 사람들은 한 동네서 다 10년 이상씩 같이 살다보니 서로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더"라고 말했다. 견씨에 따르면 98년 공동체 형성 이후 옮겨간 세대가 겨우 10가구라니 정들 수 밖에 없다. 어디나 문 열려 있으면 들어가서 놀다 오고 밥 때 되면 한끼 밥상에 같이 어울려 먹고 하는 이웃의 개념이 살아 있는 곳이다. 비록 누추해도 집 걱정이 없다보니 소득은 낮지만 살림이 크게 힘든 줄도 모른다. 주민 이정희(49)씨는 "91년 처음으로 내 집이라고 가져 본 것이 여기였다"며 "그 후로는 집 걱정 안 하니 아이들 교육을 안심하고 시킬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딸은 부산해양대 장학생으로 올해 조기졸업할 예정이다.
마을이 이웃공동체로서 살아있다는 것은 동네를 돌아보면 금세 느껴진다. 비록 집은 볼품이 없고 길은 꼬불꼬불 돌아다녀야 하지만 골목에 쓰레기가 하나도 없다. 물만골공동체는 황령산 생태계 복원 및 쓰레기 배출 없는 마을만들기 운동을 펴서 2002년에 부산시가 주는 부산녹색환경상을 타기도 했다. 아이들은 어른을 만나면 인사를 한다.
물론 이 곳에도 고민은 있다. 우선은 주민들 간에도 재개발 방식을 놓고 이견이 있다. 물만골공동체는 이곳에 저층 주택을 지어 친환경마을을 만든다는 계획이지만 연제구의 땅값이 계속 올라가다보니 이곳을 번성한 재개발 지구로 꿈꾸는 이들의 소리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견 때문에 2003년 상반기에는 공동체가 와해될 위기에까지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해 9월 현 위원장인 견씨가 맡으며 물만골공동체는 다시 생태공동체로서 꿈을 추스리고 있다. 견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일용노동자 출신. 현재도 경남 지역의 공사현장에서 배관일을 하고 있다. 전 위원장인 이씨가 나가고 견씨가 들어선 것은 물만골공동체 지도부가 학생운동권에서 명실상부한 빈민으로 옮겨갔다는 의미도 된다. 그만큼 대안운동 차원에서는 진일보한 셈이다.
또다른 고민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 지역은 도시계획상 공원지구로서 주택을 지을 수 없는 곳이다. 무허가 주택은 보강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헐고 새로 세운다는 것은 규정상으로는 엄연한 불법행위이다. 지방자치단체가 도심 개발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시각을 갖지 않으면 성사되기 힘든 일이다. 이곳에서 20년째 살고 있다는 김복자씨는 "겨울이면 어깨가 시려서 살 수가 없심니더. 우리 손으로 이만큼 해냈으니 가난한 사람도 말끔한 제 집에서 살 수 있도록 정부에서도 힘써주면 고맙지예"라고 말했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 공동체 또다른 구심 공부방
물만골공동체를 묶어주는 또다른 구심체는 공부방이다. 천주교도시빈빈사목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공부방이 생겨난 해는 94년. 이 곳은 물만골의 초·중등학생을 대상으로 방과후 아동지도를 해주고 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학생은 32명. 25명의 자원봉사자가 교사를 맡아 학습활동은 물론 음악 미술 무용 컴퓨터 축구 같은 것도 지도해준다.
이곳의 상근 실무자인 김진우(31)씨는 10년전 경남대 화학과 학생일 때 물만골의 아랫동네에 살면서 황령산에 약숫물을 뜨러 왔다가 이곳을 보고는 자발적으로 찾아와 자원교사가 됐다. "공부 자체보다는 아이들이 자연을 더 많이 벗삼게 하기 위해 야외 프로그램을 많이 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이 곳에도 공부를 신경쓰는 학부모들은 학원으로 보내서 학생들은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김씨가 가장 보람으로 느끼는 것은 공부방을 거쳐간 이들이 이제는 대학생이 되어서 다시 자원봉사자로 오는 일. 현재 자원교사 25명 가운데 5명이 이곳 출신이다.
이경민(24·경성대 디자인과 3학년)씨도 중1때부터 이곳에 다니기 시작한 1세대. 그는 고등학생 때 집이 연산시장 쪽으로 이사가면서 물만골을 떠났지만 대학생이 되자 자원교사로 다시 이곳을 찾았다. "어릴 때 자원교사들을 보면 나도 커서 그렇게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실천하게 돼 기쁘다"는 그는 "청소년기에는 가난이 부끄럽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우리는 공부방에서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컸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공부방에서 배운 것은 공부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었고 지금도 제자들에게 공부보다 그런 것을 더 가르쳐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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