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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전용관]"사춘기시절 나의 여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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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전용관]"사춘기시절 나의 여신이여"

입력
2004.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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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는 과거의 수많은 사건과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군복 차림으로 복도를 활보하던 교련 선생, 정문 안쪽에 도열해 서 있던 선도부, 회수권과 안내양, 진추하와 이소룡 그리고 고고장의 장면들까지.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환기작용을 일으켰던 건 이소룡의 괴조음도 잔혹한 학교도 아니었다. 못잊어 떡볶이 집의 인심 좋은 글래머 주인 아줌마 역을 맡은 김부선(사진)이었다.이 캐릭터는 유하 감독에게 남아 있는 두 개의 추억이 만나 어우러진 것이다. 그가 1989년에 내놓은 시집 '무림일기'에서 "밤늦게 떡볶이 먹다 떡볶이집 아줌마한테 유혹당한 나"('그로잉 업―영화사회학')라는 구절. 그리고 그의 청춘을 뒤흔들었던 섹스 심볼 김부선. 감독은 두 가닥을 추억을 꼬아서, 야심한 밤에 순진한 고등학생 현수(권상우)를 꼬시는 분식집 주인 역할을 만들고 그 자리에 김부선을 앉혔다. 젊은 날의 여신에 대한 예우인 셈이다. 그렇다면 김부선이라는 여인은 과연 누구이길래 유하 감독이 그토록 오마주를 바쳤을까?

우리에겐 안소영―오수비를 잇는 '3대 애마'(당시 이름은 염해리)로 알려져 있는 그녀는 1983년 김성수 감독('영어완전정복'의 김성수 아님)의 '여자가 밤을 두려워 하랴'로 데뷔했다. 유하 감독은 당시 같은 과였던 김성수 감독('영어완전정복'의 감독)과 그 영화를 보며 그녀의 매력에 빠졌는데, 이후 김성수 감독이 '비트'의 마담 역으로 김부선을 캐스팅한 것도 아마 그때의 감흥 때문이 아닐까무작정 추측해 본다. 아무튼 그녀의 대표작은 역시 '애마부인 3'이었다. 본 지 오래 돼 스토리는 가물가물하지만, TV로 씨름 중계를 보며 마스터베이션을 하던 그녀의 모습은 당시 사춘기였던 필자에겐 꽤나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후 그녀는 '토요일은 밤이 없다'에서 댄서로 나와 미끈한 각선미를 선보였고, '지금은 양지'에서는 진지한 청춘영화에 도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아픔이 있었다. 대마초 사건과 미혼모라는 꼬리표. 그리고 90년대의 그녀는 마담 역할로 기억될 뿐이었다. '게임의 법칙''너에게 나를 보낸다''리허설''비트'는 그녀가 모두 술집 마담으로 출연한 영화들이다. '삼인조'에서는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는 여인이었고, 'H'에선 미스터리한 사연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한참 연기력에 물이 오를 30대에, 김부선은 고정된 이미지의 배역만을 맡아왔던 것이다. 그것도 그저 퇴폐미만을 강조한. 그녀에게 존재하는, 왠지 모를 해방감과 감수성 풍부한 표정은 그렇게 묻혀갔다. 감히 말하건대, 이건 충무로의 큰 손실이었다.

선우일란 김문희 나영희 오수비 안소영…. 한때 수많은 관객들을 휘어잡았지만 어느새 잊혀져 버린 여배우의 이름만큼 슬픈 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말죽거리 잔혹사'의 김부선은 눈물나게 반갑다. 그 호리호리한 배우가 스크린을 꽉 채우는 느낌은("이것 좀 만져봐"라는 대사와 함께)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관록파 배우의 존재감이자, 이 영화에서 손에 꼽힐 명장면이다. 아, 김부선! 그녀가 이 영화로 화려한 컴백을 이루길 진심으로 바란다.

/김형석·월간 스크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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