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에에서 한 줄기 빛을 찾은 나는 도대체 알로에가 뭔지 그 정체부터 알고 싶었다. 1975년 당시 알로에는 일부 농장에서 관상용으로만 재배했을 뿐 건강식품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랍어로 '맛이 쓰다'라는 뜻과 '사막의 생존자'라는 별명을 함께 지닌 알로에는 이 땅에선 미지의 식물이나 다름없던 때였다.나 또한 57년 부산 대신동에서 '남양원예'란 꽃·식물 농장을 개업한 이후 카네이션과 파인애플, 바나나 등을 기르고 연구해 웬만한 식물에는 도통했지만 알로에는 관상용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 알로에가 그토록 신비한 효능을 지녔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우선 일본의 여성 잡지 '주부의 벗'에서 펴냈다는 '알로에 건강법'이라는 책을 읽기로 했다. 알로에를 복용한 뒤 위장병을 깨끗이 고쳤다는 초등학교 동창 정길금의 농장 주인이 일본에서 이 책을 보고 알로에를 구해 먹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손에 넣기가 쉽지 않았다. 외국 서적상 골목인 부산 광복동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결국 한 서점에 특별주문을 했고 일본에서 책이 도착하려면 한 달은 걸린다는 대답에 만족해야 했다.
일단 책의 내용을 보고 효능을 판단키로 한 나는 반신반의속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내엔 알로에에 관한 서적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과학적 근거가 희박할 것이라는 회의가 컸지만, 정길금의 말처럼 '비쩍 마른 주인이 달라졌다'는 사실 자체도 내겐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부산 동아대 문학부를 졸업한 내가 원예업에 뛰어든 사연을 짧게나마 설명해야겠다. 대학 2년 때인 50년 한국전쟁을 맞은 나는 반공을 기치로 내건 학생운동과 함께 기독교사상연구회 등 사회단체 활동에 흠뻑 빠져들었다. 사회개혁을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나는 동료들과 외국서적 장사에 이어 제지공장 등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손을 들고 말았다. 그리곤 스물 아홉의 한창 나이에 실업의 고통을 맛보게 됐다. 건강에 발목이 잡혀 마땅한 취직자리를 얻기가 여의치 않은데다 뚜렷한 기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는 초등학교 1년 후배인 최승규에게 원예를 배웠다. 그는 젊은 시절 부산 동래에 있던 우장춘(禹長春·59년 작고) 박사의 중앙원예시험장에서 꽃 재배를 배운 전문가였다. 나는 일본의 농과대학 원예강의록을 통해 토양학 식물 생리학 농약학 등을 섭렵해 나갔고 나름대로 재미를 느끼며 일가를 이뤘다. 문학을 전공했지만 어려서부터 자연과학에 흥미를 느낀 터라 원예학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이렇게 원예업과 인연을 맺은 나는 당시 대신동에서 농장을 하고 있었지만 '푸로폰'이라는 약물에 중독된 70년 이후 5년 동안 일을 팽개친 상태였다. 어느날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가슴에 심한 압박감을 느껴 약국을 찾았는데 약사에게 푸로폰 2알을 건네 받은 게 화근이었다. 푸로폰은 중독성이 매우 강한 진정제였고 나는 하루에 12알이나 먹어야 할 만큼 증상이 심해졌다. 결국 푸로폰이 없으면 생활자체가 힘들어 정신신경증(노이로제)으로 병원을 들락거리는 신세가 됐다. 이런 마당에 농장 일을 제대로 돌볼 리 만무했다. 그나마 칠순이 넘은 노모가 일꾼들을 다독이며 근근이 농장을 꾸려나가고 막내 삼농이가 돕는 형편이었다.
알로에를 믿고 다시 한번 살아보자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병마의 고통은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고 그러는 사이 "2달을 넘기 기 힘들다"는 사형선고는 시효의 종착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내게 사형선고를 내린 이는 다름아닌 장기려(張起呂·95년 작고) 박사로, 인술(仁術)을 펴는 명의로 명성이 높던 분이니 선고의 '신빙성'을 의심하기도 힘든 노릇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로에 건강법을 읽고 난 다음에 죽어도 죽어야 겠다고 삶에 대한 애착을 되살렸다. 그리고 드디어 2달의 시효가 끝나갈 즈음인 75년 3월 중순 책을 얻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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