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편견이 있다.어떤 소설이 '나는…'으로 시작할 때, 그 '나'를 작가의 성(性)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 남성 작가의 소설 속 '나'는 남자, 여성 작가의 소설 속 '나'는 여자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좀 늦게, 화자(話者)의 성별이 처음 생각과 다름을 알고는 놀랄 때가 종종 있다.
이순원(47)씨가 펴낸 장편소설 '스물 셋 그리고 마흔 여섯'(이가서 발행)도 이런 편견에서 비켜서 있다. 남성 작가인 이씨가 쓴 스물 셋 여자와 마흔 여섯 여자의 사연은 '여자들의 얘기'다. 2001년 월간 '문학사상'에 1년 간 연재했던 것을 다듬어 펴냈다. 이순원씨는 "신인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여성 작가로 알았다더라"며 웃었다. "여성적 어투와 문체를 사용하고 여성적 시각을 갖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여성이 겪어온 삶이 내게는 공기처럼 익숙하다."
그렇게 낯익은 여성 얘기는 어렸을 적 함께 어울렸던 고향 '여자애들'과 지금껏 이어지는 사귐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다. 고향 강릉의 초등학교 동창들과 각별한 정을 다져온 그는 "그 애들의 삶의 내력이 오래도록 내 마음에 담겨 있다"고 털어놓았다.
마흔 여섯 살의 엄마가 집을 나갔다. 아빠와 상의 없이 1억원을 쓰곤, 다그치는 아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나가버렸다. 엄마의 말 못하는 사연처럼 스물 여섯 살인 딸 윤희에게도 비밀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사촌오빠의 아이를 임신했던 윤희는 '세상에서 엄마와 딸만 아는' 것으로 하고, 엄마의 손에 끌려 병원에 가서 낙태한다.
엄마에게 첫사랑이 있었다. 연모하던 이웃집 오빠에게 마음을 주고도, 낡은 속옷이 부끄러워서 몸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흔 여섯이 된 엄마에게 첫사랑 오빠 소식이 들려왔다. 오빠의 고향 집이 남의 손에 넘겨질 처지가 됐다는 얘기를 듣고, 엄마는 어렸을 적 실수한 자신을 오빠가 따뜻하게 감싸줬던 추억을 떠올렸다. 추억의 빚을 갚기 위해 엄마는 오빠에게 1억원을 건네 주었다. 돌아온 엄마가 폐암으로 입원한 뒤 비밀을 알게 된 딸은 '참 아름다운 사랑'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엄마는 언제나 마음 졸이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서울에 올라와 공장에서 일했고, 자신처럼 가진 것 없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남편이 성실하게 일했고 때마침 경제 성장기이기도 해서 웬만큼 자리를 잡게 됐다. 이순원씨는 "같이 커온 동창 여자아이들의 모습이다. 궁핍과 아픔을 겪어온 그때 그 소녀들이 우리 시대의 엄마가 됐다"고 말했다. "엄마가 살아왔던 시절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들이 어떻게 엄마의 자리에 왔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어렵지만 훈훈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삶이 따뜻해질 것이다." 그 엄마 세대와 천둥벌거숭이 같은 딸 세대가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작품을 썼다고 이씨는 말했다.
'스물 셋…'은 이순원씨의 열 번째 장편이다. 다작이 아니냐는 질문에 작가는 "외국 작가들의 저작물 목록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그들은 쉬지 않고 쓴다. 그들처럼 부지런히 글의 집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음 작품 계획을 묻자 이씨는 "내 소설의 결말이 대개 따뜻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나로부터 낯선, 비극적이고 위악적인 작품을 써보고 싶다"고 답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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