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말이나 설날 연휴 직전마다 국내 증시에서는 반복되는 악습이 있다. 바로 '얌체공시'다. 일부 부도덕한 기업들이 명절 분위기에 들떠 투자자들이 신경을 덜 쓰는 때를 골라 불리한 공시를 쏟아내는 것이다. 지난해에도 거래소 상장 및 코스닥 등록 기업을 합쳐 10개사가 설날 직전 '얌체공시'를 쏟아냈는데, 대부분 실적 악화나 계약 위반 등 기업 입장에서는 감추고 싶은 내용들이었다.그런데 올해 '얌체공시' 대열에는 정부도 합세했다. 설날 연휴로 이미 귀성전쟁이 시작된 20일, 외교통상부와 농림부가 '쌀 재협상'을 개시키로 했다는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더구나 농림부는 이날 아침까지만 해도 보도자료와 함께 일반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별도의 관련 브리핑을 하겠다고 했으나, 이마저도 돌연 취소했다.
정부는 보도자료에서 "협상에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쌀 재협상'을 조기에 개시키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날 중에서 왜 하필 설날 연휴 직전을 발표 시점으로 삼았는지에 대해서는 '얌체공시' 기업처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고위 통상관계자는 쌀 재협상에 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언제,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협상을 시작하느냐 여부는 모두 협상 전략"이라고 말해 왔다. 그렇다면 설날 직전 협상 개시를 선언한 것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문가들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쌀 재협상 문제가 총선 이전에 공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명절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 같다"고 추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정부는 쌀 재협상의 단추도 잘못 꿰고 있다.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 못한 통상 협상은 한·칠레 FTA만으로도 충분하다.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이 최소한 코스닥의 '얌체기업'보다는 투명하게 추진되기를 기대한다.
조철환 경제부 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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