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처지에 라면 두 개도 고맙지. 이래봬도 단골이야, 허허."가게에 들어선 임수동(80·성북구 미아동) 할아버지가 "그새 다 가져갔네" 하더니 매장 안을 꼼꼼이 둘러본다. 큼직한 비닐 봉투에 주섬주섬 챙긴 라면 두 개, 빵 한 봉지, 삼분카레, 칫솔 등 물건값은 모두 1만1,500원.
임 할아버지가 쌈짓돈 대신 회원카드를 내밀자 직원이 "오늘 마지막 손님이시니까 이건 덤이에요" 하며 사탕과 빵을 할아버지의 봉투에 함빡 담아준다. "정말 그래도 돼? 할멈이 좋아하겠네. 한달 뒤에 봐." 검버섯 핀 할아버지의 이마엔 웃음주름이 잡혔다.
지난해 3월6일 서울 도봉구 지하철 4호선 창동역 1번 출구에 둥지를 튼 서울푸드마켓은 저소득층을 위한 국내 최초 상설 음식 나눔 공간이다. 회원은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한 달에 한번 최대 5가지 물품을 무료로 직접 골라 가져갈 수 있다.
푸드마켓(Food Market)은 기업 등으로부터 음식물을 기증 받아 양로원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등에게 일괄 분배하던 푸드뱅크(Food Bank)에 슈퍼마켓 기능을 보완한 셈. 모두 무료지만 가난한 자의 자존심을 세울 양으로 마련된 저금통엔 물건값으로 500원을 지불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푸드뱅크가 공급자 중심이라면 푸드마켓은 수요자 입장에 서있다.
거저 받는 거야 다를 바 없지만 장보듯 골라가는 이점 때문인지 200가구로 시작한 푸드마켓 회원은 1년도 안돼 3,500가구를 훌쩍 넘었다. 하루 평균 이용객은 120여명. 오전10시 개시(開市) 전에 식료품을 고르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설 정도로 가난한 이웃에겐 인기다.
15개 업체가 정기적으로 쌀 야채 김치 라면 등을 공급하고 있지만 18평 매장에 진열된 식료품은 늘 부족하다. 이용자는 느는데 기탁물품은 한정된 탓에 쌀이라도 들어오는 날엔 그야말로 전쟁터가 된다는 게 직원들의 설명이다. 매달 쌀 200㎏이 들어오지만 한 가구에 2㎏씩 돌아가는 터라 혜택을 보는 건 100가구에 불과하기 때문.
그래도 보잘 것 없는 살림살이의 회원들을 돈 없다 괄시 안하고 늘 따뜻이 맞아주는 터라 푸드마켓은 가난한 이웃의 단골가게이자 외로운 노인들의 사랑방이다. 한 할머니가 "저 세상 간 영감얘기도 재미있게 들어주니 얼마나 고마워. 음식 못 받는 날도 발길이 끌려" 하며 방긋 웃자 박모(74) 할머니도 "단골가게에 음식이 넉넉하면 더 좋지" 하곤 한마디 걸쳤다.
회원들의 바람처럼 가져갈 수 있는 음식물이 넉넉하면 좋으련만 꽁꽁 얼어붙은 경기 탓인지 흔하디 흔한 설 맞이 떡국용 가래떡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 라면이라도 넉넉히 진열해 둔 날이면 그나마 다행. 가져갈 물건이 없어 빈손으로 돌아가는 노인을 붙잡고 차비라도 챙겨주는 게 푸드마켓 인심이다.
처음 시작할 때 매주 한번 5가지 물품을 가져가게 하다가 한 달에 한번으로 바뀐 것도 기탁 음식물 부족이란 안타까운 사연을 달고 있다. 음식물을 공급하는 업체도 고맙지만 남 모르게 물품을 전하는 작은 정성이 절실한 까닭이다.
푸드마켓 직원 2명과 자원봉사자, 회원들은 이름 없이 음식을 나누는 이웃을 천사라고 불렀다. 서울푸드마켓 곽은철 소장은 "매달 보름 빠짐없이 참치 캔 등 음식물을 싸 가지고 슬쩍 와선 '자 이거 받아요' 하곤 휙 사라지는 '15일의 천사' 아주머니가 있다"고 소개했다.
이용자는 계속 늘고 있지만 기탁자는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푸드마켓은 아직 절반의 성공이다. 성공의 열쇠는 작은 정성이나마 나눌 준비가 된 천사들이 쥐고 있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가난한 이웃에게 음식과 덤으로 사랑까지 전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직접 방문하지 않더라도 전화 한 통화면 푸드마켓 직원이 음식물을 받으러 달려간다.
서울광역푸드뱅크 관계자는 "음식물을 나누는 작은 관심이 어려운 이웃에겐 큰 보탬이 된다"며 "저소득층이 모여 사는 강북지역 1호점에 이어 서쪽에도 곧 2호점을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울푸드마켓 개장시간은 평일 오전10시∼오후5시, 토요일 오전10시∼오후1시, 일요일은 쉰다. 문의 (02)907-1377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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