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람이 차디찬 요즘입니다. 혹시, 감기 걸리신 건 아니겠죠? 온몸이 오싹하는 찬바람 속에서도 이내 곧 찾아올 봄을 상상하며 즐거워 하실 당신께 러브레터를 띄웁니다. 그러고 보면 유감스럽게도 전 장문의 편지를 써 본 적이 없네요. 편지 쓰는 걸 참 지겹도록 싫어하거든요. 학교 다닐 때 문예반에라도 기웃거렸거나, 문학소녀의 꿈을 가져보지 못한 때문이라고 군색하게 둘러대곤 합니다. 하지만 편지지 몇 장 채우는 게 무어 그리 힘든 일일까요?이렇게 러브레터를 쓰려니 대학 시절이 생각나네요. 남자에게서 편지를 받은 게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디어 허니'로 시작하는 그 편지를 받고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너무 뛰었죠. 그런데 막상 답장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으니 세상에 그런 바보천치가 나말고 또 있을까요. 그 때 답장을 썼더라면 멋진 의대생으로부터 새콤달콤,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는 긴 두루마리 편지를 받았을지도 몰랐을 텐데…. "아유, 마음으로 대신하면 되잖아. 텔레파시라는 것도 있고"하며 패잔병처럼 후퇴해 버리고 말았죠.
그러나 이젠 아닙니다. 조촐한 마음 한 구석을 적고 그리움이란 우표를 붙여 남몰래 우체통에 넣고 싶네요. 당신께 이 러브레터가 도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제 가슴 속 따뜻한 온기는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은 이 땅에서, 아니 좀 보태서 얘기하자면 우주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분이시니까요. 연극배우 박정자라는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 주시는 당신은 바로 제 '관객'입니다. 당신이라는 든든한 백을 믿고 넘어지더라도 아프더라도 다시 일어나 이 길을 달려왔어요.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라는 만해 한용운의 시처럼 당신은 제 '님'이십니다.
기억 나세요? 같이 울고 웃던 일. 나는 무대에서 당신은 객석에서. 그렇게 저희는 꼬박 40년 넘게 만나왔지요. 카페 떼아뜨르에서, 드라마센터에서, 명동예술극장에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산울림 소극장에서, 운니동 실험극장에서, 그리고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데이트 장소는 남루하고 궁벽했던 적이 많았어요. 모시기 부끄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연극을 사랑한다는 마음 그거 하나만으로도 저흰 행복했지요.
아실지 모르겠네요. 당신을 만날 때마다 제 입술은 바싹 마르고 가슴은 콩닥거렸답니다. 그래도 세월이 흐르고 보니 제 사랑이 짝사랑이 아닌 것 같아 그렇게 좋을 수 없어요. 당신이 주신 기쁨의 부피를 잘 아는 저이기에 무대에 서면 모든 걸 다 끄집어냈어요. 고백하건대 공연이 하루에 잇따라 두 번 있을 때는 꾀가 나기도 했어요. '다음 번을 위해 힘을 조금 아껴뒀다가 나중에 쓰자.' 그런데 일단 무대에서 당신 눈과 마주치는 순간 그런 마음이 싹 가시죠. 얕은 수작일랑 집어 치우고 에너지를 다해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져요. 그렇게 무대 위에서 한 바탕 쏟아 붓고 나면 전 정말 다음 공연을 망칠 것 같아 무서워요. 에너지도 없고 더 보여줄 무엇도 없을 것 같아서죠.
그런데 신기한 일입니다. 분장실에 앉아 잠깐 쉬고 나면 샘솟듯 다시 힘이 넘치니까요. 보약이나 영양제를 먹는 것도 아니고 식사라고 해야 고작 된장찌개, 김치찌개가 고작인데. '사랑의 힘'이라고 수긍하는 외에 달리 그걸 설명하려는 건 어리석은 일이죠. 그러나 제 사랑의 이 일방통행에 많은 사람들이 가슴 아팠을 거예요. 아이들도 남편도 한 번도 저를 독차지하지 못했어요. 제 가슴 한 구석에 늘 당신이 자리하고 계셨으니까요. 당신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고 앞으로도 늘 새롭게 만날 생각에 가슴이 벅찹니다. 안녕, 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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