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광릉 숲에 고운 흰 눈이 내렸습니다. 오랜만에 펑펑 쏟아지는 아름다운 눈송이에 감동하면서도 제가 한 일은 고작 퇴근길을 재촉하는 것이었습니다.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옆 연구실 어린 후배들의 컴퓨터 바탕화면에 올려진, 익살맞게 웃고 있는 눈사람 사진을 보면서 생활에 눈을 가려 작고 소중한 즐거움을 잃고 사는 어른이 돼 버린 스스로를 발견하고 조금 쓸쓸했습니다. 그래서 나뭇가지마다 쌓인 눈들이 바람에 날리고, 한낮의 햇살에 녹아 점차 흔적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자꾸만 바라보게 되나 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은 규칙과 자유로움의 절묘한 조화였습니다. 겨울이 되어 비로소 제대로 드러난 나뭇가지들은 제각기 뻗어나갈 공간을 찾아 자유롭게 자라온 것 같지만 어느새 자신만의 고유한 수형(樹形)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메타세콰이어는 긴 이등변삼각형, 느티나무는 통통한 타원형, 서어나무는 역삼각형, 가지가 늘어진 능수버들은 긴 사각형, 계수나무는 부채모양…. 물론 이렇게 나무들이 제 모습을 가지고 있어도 장애물, 예를 들어 전깃줄이 지나간다든지, 건물이나 큰 나무가 가린다든지 하는 치명적인 상황에 부딪히면 수형이 망가집니다. 사람도 타고난 본성이 있어 대개 그대로 자라나지만 나쁜 환경에 부딪히면 엇나가기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좀 더 가까이 들어가 줄기를 들여다보아도 그렇습니다. 잎이 떨어진 나무에서도 겨울 가지에서 잎이 떨어진 흔적(이를 엽흔(葉痕)이라고 부릅니다)을 볼 수 있는데 그 모양이 나무마다 일정해서 1개의 마디에 2장 이상의 잎이 붙는 잎차례를 돌려나기, 2장씩 잎이 마주 붙는 것을 마주나기, 한 마디에 잎이 하나씩 붙은 것을 어긋나기라고도 합니다.
재미난 것은 돌려나는 것은 물론 어긋나는 데도 규칙이 있습니다. 지금 만날 수 있는 가지의 끝을 잘라 수직으로 세우고 서로 겹치는 방향에 있는 잎을 표시한 다음, 그 사이에 있는 잎의 수에 1을 더해서 분모로 하고, 겹치는 방향의 잎이 달리려면 몇 바퀴를 돌아야 하는 지를 새어 분자로 하면 나무 종류마다 서로 다른 분수가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자작나무는 1/3, 참나무류는 2/5처럼 말입니다.
이 엽흔들은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관속흔(管束痕)도 볼 수 있습니다. 그 흔적들은 성장이 왕성하던 시절, 물과 양분을 운반하던 통로의 흔적들이지요. 나이 든 사람의 얼굴과 말 속에서 지난 세월을 어렴풋이 읽을 수 있듯이 잎이 떨어진 흔적을 바라보면 그 자리에 달렸던 지난 계절의 푸르름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겨울에 드러난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며 "우리도 그들처럼 자유로운 영혼과 바른 규칙이 담긴 삶의 자세들이 서로 아름답게 어우러질 수 있었으면…"하고 소망을 빌었습니다.
이 유 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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