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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4·15 총선 출사표 정치신인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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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4·15 총선 출사표 정치신인의 하루

입력
2004.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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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악(必要惡)'이란 말은 딱 정치를 위한 것이다. 얘기만 나오면 저마다 입에 거품 물며 한말씩 욕지거리를 쏟아내거나, 아예 벌레 보듯 하는 게 정치지만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저마다 속셈 다르고 기호(嗜好) 다른 국민들을 어쨌든 뭉뚱그려가야 하는 기능이 필요하거늘.어쨌든 올해 총선은 정치 지망생들한테는 한번 희망을 걸어볼 만한 전례가 드문 호기(好機)다. 철옹성을 쌓아온 선거구의 오랜 터줏대감들이 줄줄이 손 털고 퇴장하고 있는데다, 기존 정치판에 대한 유권자들의 짜증과 그에 따른 물갈이 열망심리가 자못 심상치 않은 터. '그래 한바탕 바람만 불어준다면야.' 간절한 바람을 품고 서울의 한 지역구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있는 정치신인의 하루를 좇았다. 정치판이란 게 워낙 요지경이어서 아직은 모든 것이 서툴고 힘들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반드시 바꿔 보리라'는 의욕만은 차고 넘친다. 아무렴 현실정치의 벽이 만만하기야 하랴.

최창환(崔彰桓·42)씨의 일과는 어김없이 새벽 6시면 시작된다. 자정을 훨씬 넘겨 잠자리에 들었지만 서둘러 찬물 샤워로 정신을 깨웠다. 정치하기로 마음먹은 뒤로 거울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늘 단정한 모습을 보여야 하기 때문. 강행군으로 터진 입술이 인상을 깎을까 신경이 쓰인다. 꼼꼼하게 빗질까지 마친 뒤 집을 나선다. 아마도 선거가 끝날 때까지 집에서 가족과 오붓하게 밥 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지난 연말 신도시의 아파트를 팔고 서른평이 채 안되는 지금의 연립주택으로 이사왔다. 차액에다 운영하던 IT 벤처기업의 퇴직금 등을 합쳐 5분 거리에 월세 100만원 남짓한 사무실을 마련했다. 운동복으로 갈아 입고 길을 나섰다. 사위는 아직 캄캄하다. 선거구 내 너덧 군데 약수터와 등산로를 매일 번갈아 오른다. 주민과 안면을 트기 위한 것이지만 건강법도 된다. 오늘은 북한산 자락 ○○절 뒷편의 체육공원이다. 벌써 10여명이 나와있다.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 숫기가 적어 낯선 이에게 말 거는 게 쑥스러웠지만 이젠 체조대열에도 넙죽 끼어들 정도가 됐다. 며칠 전 낯을 익힌 한 분이 반색하며 옆에 소개했다. "새로 정치해보겠다는 젊은이야." "그래? 열심히 해봐."

이런 분위기면 OK. 간혹 성격 불 같은 이에게 혼이 나기도 한다. 며칠 전 약수터에서 악수마저 홱 뿌리친 노인도 그랬다. "정치하는 놈들은 다 꼴도 보기 싫어. 얘기하면 혈압만 올라." 이럴 때 머쓱하게 물러서면 안된다는 것쯤은 안다. "저 때문에 혈압 오르셨으니 제가 내려드리겠습니다." 어깨를 주물러 심기를 가라앉혔다. "하긴 그래도 젊은 사람이 해야지. 어디, 명함 한번 줘봐."

등산로 입구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하고는 사무실로 돌아온 시간이 9시 반. 산바람에 휘날린 머리를 또 감아 정돈하고 말쑥한 양복으로 갈아 입었다. 자원봉사자 너댓과 마주 앉았다. 오전 전략회의라지만 선거운동기간 전이라 별다른 작전이란 게 있을 리 없다. 그저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얼굴을 알리는 것뿐이다. (그런 면에서 의정보고, 당원교육 따위의 명분으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현역의원은 보통 유리한 게 아니다)

"오후에 △△세탁소를 한번 찾으세요. 주인이 동네에서 신망이 높습니다. 그 다음엔 시장에 들르고…. XX로터리에도 가서 상권붕괴 현황을 살펴보고 대안을 연구할 필요도 있습니다." 지역사정에 밝은 토박이 친구에 이어 홍보일을 돕는 후배가 말을 이었다. "장점인 친근한 분위기를 충분히 살리고, 가급적 앉아 대화하세요…." 지난번 대선 때 모 정당 일을 봐준 적이 있는데다 현직 영화감독다운 감각이 있어 이미지 관리에 큰 도움이 되는 후배다. 다들 비슷한 연배여서 격의없는 농담도 오갔다. 언뜻 조직이라기 보다는 마치 분위기 좋은 대학 동아리 같은 느낌이다.

조금씩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면서 찾아오거나 먼저 전화하는 주민들도 제법 늘었다. 점퍼차림의 중년남자 둘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이들은 "도와주고 싶어 왔다"며 자신들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를 설명했다. 알맹이 없이 겉도는 말에 감(感)이 잡혔다. 10여명 자원봉사자가 모두 제 주머니 털고있는 판에 줄 돈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깨끗하게 정치를 해보겠다는 스스로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드리겠다"며 돌려 보냈다. "못 마땅하지만 그래도 적(敵)으로까지 만들 수는 없잖아요.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을 합니다." 며칠 전 고기집에서 열린 여럿의 식사자리에 불려갔다 나오는데 누군가 "돈 내고 가라"고 하더란다. "예, 저희 먹은 건 저희가 내고 가겠습니다." 못마땅한 목소리가 뒤통수에 닿았다. "젊어서 역시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먼."

점심을 대충 때운 직후 당(黨)에서 "부대변인에 임명됐다"는 전화가 왔다. 환호성이 일었다. 명함에 현직 밖에는 쓸 수 없는 탓에 모모 단체의 정책위원, 고문 따위의 애매한 직함으로는 영 불편하던 차였다. "선거에 나오려 하니 잘 부탁한다"는 직접표현도 할 수 없어 그저 '요즘 정치' 얘기나 에두르는 상황이었다. 이제 버젓하게 정치인 직책을 박을 수 있게 됐으니. "명함 인쇄 즉각 중단하고 새로 찍으라고 해." 지난달 중순에 찍은 1만장이 다 떨어져 전날 밤 급하게 맡긴 추가인쇄였다. 그러고 보니 하루 300명 이상을 직접 만나(본인 외에 다른 이가 명함을 돌리면 그 또한 선거법 위반이다) 인사한 셈이다. "그만큼 악수도 했다는 뜻이지요. 두 손으로 맞잡고 적당히 힘을 주어 악수를 합니다. 성의를 보이고 신뢰감을 주기 위해서지요. 그래도 여전히 기성 정치인을 만나 악수를 해보면 '난 아직 멀었구나'하는 느낌이 듭니다."

난마 같은 구(舊) 주택가의 골목길을 돌아 일정에 잡힌 업소를 방문했다. "정치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겠습니까?" 질문이 뇌관이 됐다. "아, 서민들 먹고 살게 해주면 되지 그 이상 뭐가 있겠소. 국회의원 시켜주면 맨날 당 싸움에, 제 잘난 유세나 떠니. 꼴들 보면 투표하고 싶은 마음 눈꼽만치도 없지만, 그러면 또 엉뚱한 사람 도와주는 꼴이 될 테니…." 주인은 한참 역정을 낸 뒤 아내에게 드링크제를 사오라고 해서는 한 병을 건넸다. 업소 한 켠에 놓여있는 현역의원의 의정보고 인쇄물이 눈에 걸렸다. '이 분은 당원도 아니라는 데…'

이어 찾아간 시장통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장사 잘 되세요?" 좌판에서 튀김을 파는 아주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장사? 지금 3시가 넘었는데 여태 개시도 못했어. 살다살다 요새같은 땐 처음이야." 일행의 '성격'을 눈치채자 여기저기서 험한 말들이 쏟아졌다. "도둑놈들 다 바꿔야 돼. 하여간 국회의원 몇번 하면 다 허가 낸 도둑놈들이라니까." "대통령은 또 왜 그렇게 가벼워. 도대체 중심 못 잡고 있으니 나라가 이 꼴이지." 돌아서면서 "돈 많이 버세요"하고 건넨 덕담에도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돈 많이 벌어 뭣하게. 그냥 먹고 살 정도면 됐지."

몇 군데를 더 돌고 나서 대충 일정이 끝났다. 이날은 저녁약속도 없었다. "(정치)프로들은 이 맘 때면 벌써 몸을 둘로 쪼개도 모자랄 만큼 바쁘다던데…. 일정이 빡빡한 날도 많지만 이렇게 스케줄이 비면 솔직히 불안하지요. 어쨌든 우선 당내 경선부터 넘어야 하는데…." 그래도 최씨는 신인답게 금세 걱정을 털어냈다. "직접 주민들과 얘기하면서 배워가는 것만해도 보람이 커요. 기존 정치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확인하며 의지를 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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