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는 15일 윤영관 외교부 장관의 경질 소식에 표면적으로는 한미 관계의 원론을 되풀이 했다. 미국이 한미 관계에 까다로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대외 발표용으로 선택하는 어휘들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대변인이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강조한 두 단어는 한미동맹의 '유지'와 '강화'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한미 협력을 평가하고 한미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도 상기했다. 한국 외교 장관의 교체로 한미 관계의 큰 기둥이 흔들릴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미국의 기본 입장을 읽을 수 있는 대목들이다.
하지만 바우처 대변인은 미묘한 표현으로 미국의 유쾌하지 않은 심기를 드러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한미 양국이 주요 관심사에 대해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전체적인 그림 하에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각론, 즉 이번 사건의 경우에 섭섭한 점이 없지 않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표현이다.
그가 윤 장관 경질에 대한 첫 질문에 반사적으로 "윤 장관이 재임 시 한미관계 강화 및 북 핵 현안에 기울인 노력에 감사를 표하며 그의 행운을 빈다"고 대답한 데에도 윤 장관을 전격적으로 바꾼 것에 대한 유감이 배어 있다.
미국 정부는 사실 윤 장관이 북한 핵 문제,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문제 등 한미 관계를 자칫 위태로운 상황에 빠지게 할 수 있는 현안을 다루면서 신뢰의 기조를 흩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온 점을 평가해왔다. 그런 신뢰의 기조가 대미 편향적 자세로 해석된다는 게 미국 정부로서는 달가울 리 없다. 다만 미국은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으로 비칠 수 있는 답변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
보다 직접적인 반응은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과 언론에서 나오고 있다. 한반도 전문가들은 윤 장관 경질의 직접적 배경을 한국 내부 외교 노선의 갈등에서 찾고 있다. AFP 통신은 한국 정치 학자의 말을 인용, "윤 장관은 미국과 북한에 대한 한국 외교 정책의 분열 때문에 희생됐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노 정권 출범 초반부터 갈등해 온 대미 자주파와 동맹파간의 힘겨루기가 자주파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남으로써 향후 대미 관계에 어려운 요소로 작용할 소지를 지적하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6일 "미국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겠다는 선동적 수사와 우방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는 뒤늦은 선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노무현) 대통령을 상대하는 데 부시 행정부는 놀라울 정도로 감정을 억제해왔다"면서 "노 대통령이 윤영관 장관 경질 기조를 이어나간다면 미국 정부의 인내심이 머잖아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뉴욕타임스는 윤 장관 사임 파문을 역내 외교정책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노 대통령의 승리로 규정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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