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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금서, 세상을 바꾼 책

입력
2004.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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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범 지음 이끌리오 발행·1만5,000원

니체(1844∼1900)는 저작(著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쓰인 것 중에서 나는 오로지 저자의 피로 쓴 것만을 애호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당신은 피가 정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지식과 정보를 보존하고, 사상과 창작의 표현물인 책은 종종 저자의 고통과 불행을 감수한 결과물이다. 인류 역사 발전에 공헌한 위대한 저작들은 작가의 목숨을 바치고 얻은 값진 대가이기도 하다.

오늘날 고전으로 인정받는 상당수의 책들은 금서였다. 오죽했으면 '서양철학을 알려면 교황청의 금서목록을 읽어라'는 말이 있을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한상범(68) 동국대 명예교수가 쓴 '금서, 세상을 바꾼 책'은 이렇게 '피로 쓴 유산'들을 통해 들여다 본 인류 지성의 발자취이다. 16세기 르네상스부터 20세기초 러시아 혁명기까지 나왔던 금서들이 그 대상이다.

저자의 '금서 진상규명'은 '데카메론'에서 출발한다. 피렌체의 인문학자 보카치오(1313∼1375)의 대표작인 이 소설은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펼치는 음담패설 등을 모은 것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성적 욕망과 속임수를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근대소설의 시작으로 꼽히는 이 책은 호색적이고 음란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20세기초 일본에서도 판매금지 처분을 당했다. 미국 관세국도 음란서적으로 판정한 바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프랑스의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오늘날 민주사상의 씨앗을 뿌리고 근대 교육철학의 기반을 구축한 개혁사상가이지만 당시에는 군주와 귀족들에 정면으로 대든 이단아이자 '정신 이상자'였다.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사유재산의 발생이 불평등을 초래한다고 주장, 사상이 불온하고 과격한 요주의 인물로 지목됐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1828∼1910)는 '인생론'을 발간한 즉시 판매금지 처분을 당했고, '부활'에서는 동방정교회를 비판해 파문을 당한 후 방랑의 세월을 보내다가 시베리아의 시골역에서 객사했다.

저자는 사상적 선지자들은 대부분 남보다 몇십 년 앞을 내다보는 안목을 갖고 기존 권위나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함으로써 기성세력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그는 1970년대 독재 치하에서 탄압과 속박, 감시와 밀고의 체제에 정면으로 항거하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이적 표현의 죄'를 규정한 국가보안법 체제는 결국 우리나라가 사상을 통제하는 금서제도를 인정하는 나라임을 시인하고 있는 꼴이라며 이를 폐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1976년에 '금서로 본 근대사상사'를 내기도 했던 저자는 "지금까지 금서라는 규제에 충실하게 따른, 지적 불구자인 '모범생'이 사회에 남긴 것을 돌아본 수기로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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