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썰미 없는 사람에겐 그저 ‘치마저고리’일뿐인 한복. 그러나 한복에도 유행이 있으며 한복차림에 관한 한 패션리더는 단연 영부인들이었다. 취임식이나 각종 의전행사에서 선보인 퍼스트레이디들의 한복차림은 당대의 한복디자인 트렌드는 물론 시대정신과 그녀들의 독특한 품성까지 엿보게 해준다.민족의 명절인 설, 역대 영부인들의 한복차림을 통해 우리 전통옷의 이유있는 변화를 좇아가보자.
육영수 소매·치마 짧아 활동성과 근검 강조… 한복 가장 잘 어울려
패션관계자들은 역대 퍼스트레이디 가운데 한복차림이 가장 잘 어울린 사람으로 단연 육영수 여사를 꼽는다. 한복디자이너 김예진씨는 “1960~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대변되던 재건시대에 육영수 여사의 한복차림은 검소하고 기품있는 퍼스트레이디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평한다.
육 여사의 한복차림은 활동성을 강조하기 위해 소매와 치마길이가 모두 짧았던 것이 특징이다. 손목뼈가 드러날 만큼 소매가 짧았으며 치마길이도 발목을 살짝 가릴 정도였다. 패티코트를 속에 입어 화사하게 부풀리는 요즘 스타일 대신 당시엔 치마속에 속치마만 입어서 전체적인 실루엣도 H형태로 조촐했다.
치마와 저고리 색상이 다른 반회장 치마저고리를 입고 공식적인 자리에 자주 나타난 것도 눈길을 끌었다. 보통 우아한 멋을 위해서는 치마와 저고리 색상을 통일하게 마련이지만 당시는 근검절약이 강조되던 때라 육 여사가 손수 모범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와대 제2부속실장을 맡았던 김두영씨에 따르면 육 여사는 양장이든 한복이든 수입옷감으로 옷을 해입은 일이 없다고 한다.
이순자 화려한 금박장식 즐겨 '사치'와 '세련' 평가 엇갈려
전두환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는 화려한 한복의상으로 ‘사치스럽다’는 비난과 ‘예복으로서 한복의 디자인 수준을 한단계 높였다’는 찬사를 동시에 얻었다.
패션에 대한 관심이 많고 형광색에 가까운 꽃분홍 등 화려한 색상을 즐겨하는 성품이어서 한복에도 호사스러운 금박장식이나 기계수를 많이 사용했다. 또 외국순방 길에 영부인으로는 유일무이하게 조선시대 중전이 입던 당의(唐衣)를 입어 외신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쉬를 받기도 했다. 김예진씨는 “전통예복의 호화로운 멋을 한껏 자랑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여사의 한복은 원로 한복디자이너 이리자씨가 맡았는데 저고리 깃과 소매, 고름, 치마밑단에 화려한 금박이나 기계수를 놓고 액세서리를 우아한 진주귀걸이로 마감하는 연출법은 당시 대중적으로도 널리 유행했다. 저고리 소매는 손등을 살짝 가릴 정도로 길어졌고 깃은 좀 더 내려와 목선이 많이 보였다. 치마는 A라인으로 활짝 펴졌다.
김옥숙 은은한 파스텔색 차분한 이미지로 李여사와 차별화
노태우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는 철저하게 이순자 여사와의 차별화를 추구했다. 가뜩이나 군사정권의 연장선에 있다는 좋지않은 이미지에다 이 여사의 튀는 개성이 국민적 저항감을 키웠다는 판단 아래 온화하고 차분한 이미지를 주기위해 노력한 것.
방법은 육영수 스타일 벤치마킹이었다. 노방 소재 대신 모본단이나 육여사가 즐겨입은 양단소재가 다시 사용됐고 색상도 눈에 잘 띄지않는 은은한 파스텔계열을 이용했다. 치마와 저고리 색상이 다른 스타일도 많이 본땄다. 이는 큰 키를 보완하는 효과도 있었다. 디자인은 주로 이영희씨가 맡았으며 이때부터 금박이 사라지고 색상의 미묘한 대비가 중요시됐다.
손명순 튀는 색상 싫어해 단색 많이 입어
김영삼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의 한복차림은 ‘고집스럽다’는 한마디로 설명된다. 손여사는 튀는 색상을 싫어하고 모든 옷차림을 단색으로 코디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이런 취향은 1990년대 초반 김 대통령 재임시절을 관통하는 유행 한복스타일을 낳았다.
우선 모든 한복에 바이어스를 치는 것이 기본이었다. 소매와 고름, 저고리밑단, 깃선, 앞섶에 모두 얇은 선이 둘러쳐진 것처럼 바이어스를 대고 깃과 소매, 치마밑단에는 원단 색상과 같은 계열의 색실로 꽃과 나비를 수놓아 장식했다. 목에 주름이 많아 양장을 할 때도 항상 목이 높이 올라오는 옷을 입었듯 한복 깃도 목에 꼭 맞게 재단했고 소매도 손등을 거의 다 가릴 정도로 길었다.
이희호 온화한 색상에 명주 소재 즐겨
국민의 정부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는 역대 영부인 중 가장 한복차림을 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시민운동가답게 활동이 많았던 이유도 있지만 청와대에 들어간 초기 골절상을 당하면서 긴치마를 절대 입지말라는 주치의의 권유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많지않은 한복차림은 연보라와 연옥색, 치자색 등 온화한 색상에 명주 소재를 즐기지만 치마는 품이 넓지않고 발목 복숭아뼈 부근까지 오는 짧은 길이였다.
권양숙 자수장식 대신 소재·색상으로 우아미 최대한 살려
노무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는 한복태가 잘 나는 영부인으로 꼽힌다. 권 여사의 한복디자인을 맞고있는 김예진씨는 “밝고 화사한 색상을 선호하는데다 전문가의 의견을 믿고 따르는 편이라 트렌드에서도 앞서간다”고 말한다.
자수장식은 거의 하지않는 대신 양단이나 모본단, 오간자 등 소재와 색상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려 우아한 멋을 내는데 치중한다. 최근 한복 트렌드가 전통미의 추구와 깊이있는 색상연출로 옮아가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셈이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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