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일 근무하는 회사에 다닌다. 19, 20일은 휴가를 냈다. 신정을 지내는 집안이라 설날 차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이쯤 되면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게 된다. 17일부터 25일까지 모두 9일간의 연휴를 즐길 수 있다. 이처럼 환상적 ‘명절 보너스’는 받지 못하더라도 올 설은 직장인에게 최소한 2일 이상의 자유시간을 줄 듯하다. 어디에 쓸 것인가. 단연 여행이 1순위이다. 기왕이면 당찬 마음을 먹고 평소에 시도할 수 없었던 길을 떠나보자.
다부진 새해의 각오를 다지며
지리산 종주
우리 땅에 솟은 산으로 오악(五嶽)이 있다. 오행(五行)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두산, 묘향산, 금강산, 삼각산(북한산), 지리산이 그것이다. 3악은 북쪽 땅, 2악은 남한 땅에 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2악 중 지리산은 국토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을 마무리 하는 산이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의 기운은 지리산에 이르러 거대한 태극문양으로 휘돌아치며 숨을 고른다. 반대로 지리산은 남에서 북으로 치오르는 기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쓰여 있다.
지리산은 한마디로 거대한 산이다. 전남ㆍ북과 경남의 3개 도, 5개 시ㆍ군에 걸쳐있으며, 둘레가 8백여리, 면적이 14억5,600여만평에 이른다. 넓기만 한 것이 아니다. 기세도 우람하다. 남한 육지에서 가장 높은 천왕봉(1,915㎙)을 비롯해 해발 1,500㎙가 넘는 봉우리만 12개이다. 봉우리가 만든 골을 따라 20개가 넘는 산길이 있다. 많은 산꾼들이 ‘최고의 산’으로 꼽는 이유이다.
지리산 산행의 백미는 단연 종주다. 과거 지리산 종주는 목숨을 건 필사적인 산행이었다.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길이 쉬워지고 편의시설이 늘어나면서 시간과 인내만 있다면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산길이 되었다. 본격적인 산꾼이 되기 위한 통과 의례 정도에 불과하다.
가장 일반적인 코스는 노고단에서 출발해 주능선 천왕봉에 이르는 것. 지도상의 거리만 25.5㎞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는데다 등정과 하산 코스까지 합치면 족히 60㎞는 된다. 걷는 시간만 약 25시간이다. 최소한 2박3일이 걸리고 먼 곳에서 출발한다면 하루나 이틀의 여유를 더 갖는 것이 좋다.
첫날은 벽소령, 둘째날은 장터목 대피소나 세석 대피소 등에서 숙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피소에서 숙박을 하려면 예약이 필수.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www.npa.or.kr)를 통해 예약하면 된다.
노고단의 운해, 천왕봉의 일출, 안개에 덮인 고사목 등 지리산 종주는 내내 콧등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도는 감동적인 산행이다. 겨울에는 보너스가 더해진다. 혼절할 듯한 하얀 눈꽃이다. 대신 눈길에 대비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지리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055)972-7771.
봄(?)을 기다리는 마음
제주에서의 봄맞이
제주는 벌써 봄?. 그렇다. 원래 음력 새해가 되면 제주에는 봄바람이 분다. 더구나 올 겨울 이상 난동이 계속되자 계절을 오해한 개나리와 진달래가 이미 꽃망울을 터뜨리기도 했다.
제주에도 귀성, 귀경객이 만만치 않을텐데, 감히 설 연휴에 제주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할 필요없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제주로의 귀성객은 약 5만명. 항공기 좌석이 빠듯하다. 그래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항공은 설 연휴 관광객을 위해 왕복 48편의 항공기를 증편한다.
특급 호텔 등 대형 숙소의 예약이 어렵다면 펜션을 이용한다. 요즘 제주여행 안내의 새로운 별로 떠오른 사이트는 숙소닷컴(www.sukso.com). 제주도 펜션에 대한 정보를 얻고 예약을 하는 것은 물론 렌터카 예약과 여행 안내도 받는다.
제주의 봄은 바닷길로 온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남동풍을 가장 먼저 호흡하는 동남해안이 길목이다. 일출봉이 장쾌한 성산포, 그 앞바다에 마치 소가 누운 모습으로 떠 있는 우도,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맞는 세화해변 등이다.
성산포 가는 길에는 봄의 명물이 있다. 유채밭이다. 원래 유채꽃이 피는 시절은 3월 말에서 4월 초. 그러나 농가에서 관광객을 위해 일찍 파종한다. 이미 지난달 중순부터 유채꽃이 피기 시작했다.
일출봉이라는 이름답게 봉우리 위에서 조망하는 일출이 장쾌하지만 일출봉의 실루엣을 배경으로 그 옆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는 맛도 좋다. 그러나 일반 여행객은 그 일출 포인트를 찾기가 어렵다. 성산포 가는 길의 유채밭 중간 지점에 입구가 있다. ‘해녀의 집’이라는 이정표가 오른쪽으로 나 있다. 우회전,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약 100㎙ 진입하면 왼쪽으로 승용차 20대 정도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 곳에서 보면 해변과 일출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작가들이 쉬쉬하며 숨겨둔 일출 포인트이다.
우도는 배를 타고 들어간다. 섬 내에 순환버스가 다닌다. 차를 가지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우도봉, 검멀레해안, 하고수동해수욕장, 산호사해변 등의 순으로 여행한다. 마지막 산호사해변에서 봄냄새를 진하게 느낀다.
세화해변으로 가는 길은 아름다운 해변도로이다. 성산포에서 제주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바로 오른쪽으로 해변도로가 나 있다. 따스한 기운을 머금은 파도의 색깔이 아름답다.
원 없이 푸른 파도를 보고 싶다
7번 국도 여행
도시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 중의 하나는 동해의 푸른 파도를 보는 것이다.
회색에 찌든 가슴을 가진 도시인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것 중의 하나로 동해의 푸른 파도가 꼽힌다. 이번 연휴에 작심하고 길을 나서보자. 명절이어서 백두대간을 넘는 고갯길이 붐비긴 하지만 타이밍을 잘 조절하면 수월하게 동해에 닿을 수 있다. 여행 코스는 ‘길을 따라’이다. 다름 아닌 동해안을 남북으로 따라가는 7번 국도이다.
7번 국도는 부산에서 함경북도 온성을 잇는 길이다. 계속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총 513㎞의 해안도로이다. 분단이 아니었다면 아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해안도로는 경북 영덕에서 강원 고성까지다. 한꺼번에 모두 돌아보는 것은 버거울 뿐만 아니라 주마간산 식의 여행이 되기 쉽다. 권역별로 나누어 접근하기 쉬운 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세 개의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영덕-울진권, 삼척-동해-강릉권, 양양-속초-고성권이다. 모두 만만치 않은 풍광과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다. 물론 푸른 동해의 파도를 맞을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덕-울진권은 과거 수도권에서 너무 멀었다. 이제 중앙고속도로의 개통과 국도의 정비 등에 힘입어 ‘조금 먼’ 여행지로 바뀌었다. 거침없이 넓은 백사장을 자랑하는 해수욕장, 올망졸망한 포구, 때묻지 않은 자연 등이 자랑이다. 일출을 보기 좋은 망양정, 월송정, 난리 때마다 주민의 피난처였던 성류굴, ‘동쪽으로 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는 불영계곡이 들어 있다. 백암온천 등에서 피로를 풀 수 있다.
삼척-동해-강릉권은 일정을 넉넉하게 잡아야 한다. 볼 것이 너무 많다. 일출의 명소인 추암해변과 정동진이 1순위이다. 약간 땀을 흘리고 싶다면 두타산 무릉계곡, 오대산 소금강의 가벼운 트레킹이 기다린다. 경포해수욕장과 망상해수욕장 등 광활한 해변에서의 거친 파도맞이는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 버릴 것이다. 환선굴, 천곡동굴 여행은 보너스이다.
양양-속초-고성권은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여행지. 분단의 아픔까지 마음에 담는 곳이기도 하다. 울산바위나 비룡폭포 까지의 가벼운 설악산 트레킹과 고성 통일전망대 답사는 필수. 화진포 등 석호에서의 갈대 감상은 선택이다.
추억 속으로, 그리고 새로움 속으로
경주 뒤지기
경주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다. 1960년대에는 신혼여행지로, 이후에는 수학여행지로 각광을 받았다. 교과서에도 많이 실렸다. 그래서 만인의 가슴에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 때 경주의 모든 것을 보았을까? 그렇다 해도 지금은 많이 변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특히 여행지는 2년 주기로 변한다. 남아있는 모습과 달라진 모습을 보며 새삼 추억에 잠겨본다
불국사, 토함산, 석굴암, 첨성대 등 유물은 그대로이다. 대신 주변이 많이 바뀌었다. 요즘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경주 남산이다. 최근에야 수학여행 코스에 포함됐다. 과거엔 대부분 지나친 곳이다.
석굴암과 불국사가 신라 불교문화의 머리라면 남산은 심장에 해당된다. 468㎙의 금오산과 494㎙의 고위산 등 두 최고봉을 중심으로 40여 개의 능선과 골짜기가 펼쳐져 있다. 그냥 능선과 골짜기가 아니다. 절터가 130여곳, 석불과 마애불이 100여체, 석탑과 폐탑이 71기에 이른다. 13개의 보물과 12개의 사적, 10개의 지방 유형 문화재가 있다. 땅이름도 부처골, 탑골, 용장사골, 열반골 등 부처의 나라를 상징한다.
남산을 순례하는 코스는 모두 70여 곳. 모두 돌아보려면 한 달도 부족하다. 하루 일정으로 적당한 순례길은 배리삼체석불-삼릉-용장골코스(5시간), 부처골-남산산성-포석정코스(5시간), 통일전-칠불암-천룡사코스(5시간) 등이다. 험한 구간도 적지않아 등산화는 필수.
경주에도 바다가 있다. 바다로 나간다. 대왕암(문무대왕 수중릉)은 묘한 분위기를 내뿜는 바닷가 바위이다. 죽어서도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에 따라 신라 문무왕의 무덤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대왕암에서 약 10㎞ 지점에 감포항이 있다. 근엄한 역사 유적이 주를 이루는 경주 땅에서 질펀한 포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감포는 마을 전체가 음식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횟집은 물론 다양한 종류의 음식점이 있다. 포구 방파제에서 바라보는 겨울 밤바다가 멋있다. 경주문화관광정보 사이트 www.gyeongju.go.kr/ctour
제발 방해하지 마
강원 산골 오지에서 푹~
아무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 외부와의 연락도 닿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자유롭게 시간을 여행하고 싶다.
이 땅에 오지가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없다. 달랑 한 두 가구가 사는 산골마을에도 이제는 찻길이 뚫려 있다. 오지가 아니라 그냥 ‘깊은 산골’일 뿐이다. 그런데 겨울이면 사정이 달라진다. 찻길에 눈이 덮이면 깊은 산골은 다시 오지로 격리된다. 몸과 마음을 완전히 쉬게 하려면 그런 곳을 찾아야 한다. 오지이지만 손님을 맞는 운치있는 산장이나 깔끔한 펜션이 마련되어 있다. 숙박을 예약하면서 반드시 길의 상태 등을 확인해야 한다.
■ 진동리, 설피마을(강원 인제군 기린면)=과거에는 정말 오지였다. 양양 수력발전소를 짓기 위해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양양의 반대쪽인 인제에서 길을 냈다. 길의 길이는 약 27㎞. 진동리와 설피마을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오지의 분위기를 많이 풍긴다. 특히 겨울이면 무인지경이다. 곰배령, 아침갈이골, 쇠나드리 등 가벼운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 은비령(강원 인제군 인제읍 귀둔1리)= 소설가 이순원의 작품 제목으로 많이 알려졌다. 양양과 인제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고개가 한계령이라면 은비령은 샛길이다.
소설 제목 은비령은 ‘눈이 날리는 고개(銀飛領)’이지만 진짜 은비령은‘깊이 숨어있는 고개(隱秘領)’이다. 비포장이었던 시절에는 정말 깊이 숨어 있었다. 길이 포장되면서 세상에 나왔고 고개 중간의 필례약수가 유명해지면서 이제는 인제 여행의 필수 코스가 됐다. 눈이 높이 쌓이면 옛날처럼 깊이 숨은 고갯길이 된다. 필례약수 인근에 정갈한 숙소가 있다.
■ 미천골(강원 양양군 서면 미천리)=원래 선림원이라는 큰 절이 있었다. 스님들 공양을 위해 쌀을 씻으면 개울 전체가 하얗게 변한다고 해서 계곡 이름이 미천(米川)골이 됐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임도를 따라 자연휴양림이 조성돼 있고 약 10㎞ 지점에 불바라기약수가 있다. 불바라기산장이라는 아름답고 분위기 있는 펜션이 있다. 백두대간 고개 중 가장 풍광이 좋다는 구룡령을 넘어야 한다.
■ 어성전과 법수치(강원 양양군 현북면)=양양읍을 흐르는 강은 남대천이다. 어성전과 법수치는 남대천의 최상류 마을이다. ‘절대오지’였던 이 두 마을은 남대천의 천변도로가 포장되면서 오지의 멍에에서 벗어났다. 여름이면 피서객들로 만원을 이루는 곳이다. 불빛이 많지 않은 곳이다. 하늘의 별을 세기 좋다.
/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입력시간 : 2004-01-1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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