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Weekzine Free-커버스토리/宗家의 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Weekzine Free-커버스토리/宗家의 설

입력
2004.01.16 00:00
0 0

내가 아닌 우리를 찾아서…갖가지 소망과 덕담으로 넘쳐났던 새해 벽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에 대한 다짐과 작심으로 개미 챗바퀴 같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도약을 꿈꿨다. 그러나 지금쯤이면 그 같은 결심에 하나 둘 금이 간다.

그래서 설이 있다. 고운 옷 차려입고 온 가족이 모여 새해의 결심을 다잡는 민족 최대의 명절, 이날 우리는 가족 공동체의 따뜻한 정을 확인하고 어려운 세월을 헤쳐나가는 힘을 주고받는다. 귀성ㆍ귀경길의 발걸음이 더디고 명절 스트레스가 아무리 크더라도 튼튼한 뿌리, 힘찬 줄기, 풍성한 잎과 같은 고향과 가족이 없다면 삶이 너무 부박하지 않을까.

대구 시내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둔산동 옻골 마을. 하루 몇 차례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 소리를 빼면 고요하기 그지 없는 나지막한 고을에도 설은 즐겁다. 마을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두 그루의 회나무에는 까치 십여 마리가 앉아 목청을 돋운다. 나쁜 기운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심었다는 느티나무 수십 그루도 350여년에 걸친 세월의 시름을 잊고 묵묵히 객을 감싼다.

이 곳은 경주 최씨 칠계파(漆溪派)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마을 깊숙히 조선 영조 때 학자 백불암(百佛菴) 최흥원 선생의 종가가 터를 지키고 있다. 지금의 집주인은 백불암 14대 종손인 최진돈57)씨.

“서울에서 중소기업 임원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종가 일이라는 게 생각처럼 만만치않아요. 경조사를 챙기고, 문집을 발간하고, 일년에 16차례 있는 제사를 챙기는 것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집안에 밥 굶는 이가 없는지도 확인해야 하구요.”

올해 유난히 일찍 찾아온 설 때문일까. 설이 한 주 남짓 남았는데도 종가의 손놀림이 전에 없이 분주하다. 투박한 흙담 너머로 정겨운 도마 소리가 흐른다.

일년에 두 번씩 찾아오는 차례, 혹은 차사(茶祀)는 바쁜 문중 일 중에도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행사다. 참석 인원만 200명을 넘는다는, 종가의 설 준비는 그래서 1월 초부터 일찌감치 시작됐다. 일년에 단 몇 번 뿌리를 찾아, 그리운 얼굴을 찾아 먼 길을 오는 반가운 가족을 맞기 위한 종가의 설 준비 풍경을 엿봤다.

설맞이 | 종가집 차례상 보니…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차례상은 어떤 모습일가. 이연자 한배달 우리차문화원장이 부담없으면서도 조상에 누가 되지 않게끔 현대의 상황에 알맞은 차례상을 제안했다. 이 원장은 1999년부터 전국의 종가을 찾아다니며 종가의 전통과 예법, 음식을 취재해 '종가이야기' '명문종가를찾아서' '명문종가이야기'라는 세권의 책을 펴냈다.

우선 1열에는 떡국을 올렸다. 예서에는 명절 때는 계절에 맞는 음식을 올리도록 하고 있다. 때문에 추석 때는 송편, 설날에는 떡국을 올리는 것이 알맞다. 떡국을 올렸기 때문에 따로 밥과 국은 필요없다. 떡국 앞에는 술 한 잔과 차 한잔을 올렸다. 한국의 예학자들은 차가 귀했던 국내 사정에 비춰 차 대신 숭늉을 올리도록 했지만, 이제는 차를 구하기 어렵지않아 차를 올렸다.

다음 열은 술 안주로 육적(肉炙)고기적을 두었다. 보통은 적을 가운데 두고 국수와 떡을 같이 올리지만, 떡국을 올린 만큼 국수와 떡을 따로 둘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셋째 열에는 명태포, 삼색나물, 나박김치, 간장, 식혜를 올렸다.

보통은 둘째 열에 육적과 어적(魚炙)을 같이 올리지만, 술 안주로 고기적 한 접시와 명태포면 부족하지는 않다. 밑반찬으로 삼색나물과 나박김치를 올렸다. 흰색은 뿌리나물로 도라지나 무나물, 검은색은 줄기나물로 고사리, 푸른색은 잎나물로 미나리를 쓴다. 뿌리, 줄기, 잎이 가족 3대를 상징한다.

넷째열은 후식에 해당되는 과일줄이다. 대부분의 예서는 단지 과일만을 표시해 뒀을 뿐, 어떤 과일을 어떤 순서로 놓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계절에 맞는 과일과 함께 조상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을 준비하면 된다.

하지만 제수로 오르는 전통적 과일인 대추, 밤, 감은 조상의 지혜를 상징하기 때문에 빠질 수 없을 것 같다. 대추는 꽃마다 열매를 많이 맺어 자손번창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밤은 조상과의 연결을 뜻한다. 씨밤을 땅속에 심으면 가장 먼저 열린 씨밤은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도 썩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감은 다른 감 나뭇가지를 접붙여야 훌륭한 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도 태어나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과일의 배치 순서는 대추, 밤, 감, 배의 순서인 조율시이(棗栗枾梨)와, 붉은 대추를 동쪽에 두고 흰 밤을 서쪽에 두는 홍동백서(紅東白西)가 혼용되고 있다. 조율시이의 진설법(陳設法)과 관련, 각 과일의 씨가 각 신분을 상징한다는 설이 있다. 대추 씨는 1개로 임금을, 밤 씨는 3개로 삼정승, 감씨는 6개로 육판서를, 배씨는 많은 벼슬아치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홍동백서와 관련, 붉은 대추가 해를 상징해 동쪽에 두고 하얀 밤은 한자에서 보듯 서쪽에 심은 나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서쪽에 뒀다는 설이 있다. 이번 차례상에는 일부 예서에 나오는 홍동백서의 진설법을 따라 대추를 동쪽, 밤을 서쪽에 두었다. 가운데 배와 다식, 곶감을 놓았다.

/송용창기자

설맞이 | 차례 순서

차례는 기제사와 달리 축문을 읽지 않고, 술도 한번만 올린다. 차례 순서도 가정마다 조금씩 다른데,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차례 순서를 알아본다.

재계 :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 예복을 차려입은 뒤 제상을 차리고, 신주를 모신다.

신내리기 : 제주가 신위 앞으로 나아가 향을 사른다. 제주가 읍하고 꿇어앉아 집사가 따라주는 술을 모삿그릇에 세번 나누어 부은 뒤 절을 두 번 한다.

합동 참배 : 참석자 모두 같이 절을 한다. 남자는 두 번 절하고 여자는 네 번 절한다.

제찬 올리기 :식어서는 안되는 제수(떡국)를 제상에 올린다.

잔 올리기 : 제주가 각 신위 전에 술잔을 올린다.

식사권유 : 숟가락을 국에 놓고 젓가락은 가지런히 놓는다. 제주가 두번 절하고 주부(제주 부인)는 4번 절한다. 나머지 사람은 시립해 있는다.

수저걷기 : 조상이 진지를 드실 때까지 조용히 부복하거나 시립해 있는다. 조금 기다렸다가 주부가 수저를 시접에 담는다

합동배례 : 참석자 모두 일제히 두 번 절한다. 여자는 네 번 절한다.

신주 들여 모시기 : 신위를 제자리로 모신다. 지방을 사용한 경우에는 태워서 재를 향로에 담는다. 음식을 제상에서 내리고 모두 둘러 앉아 음복한다.

설맞이 | 차례 음식

조상을 공경하며 기리는 차례나 제사는 우리나라의 고유한 음식문화를 보존하면서 발전시키는 계기이기도 했다. 각 종가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제사음식을 살펴봤다.

고려약과= 차례음식에 빠짐없이 오르는 약과를 만드는 방법은 다양하나 모양이 다르다. 특히 경상도의 약과는 네모 모양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를 고려약과라 부른다. 원래 신라 음식으로 신라권의 경상도에서 네모꼴의 전통약과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자강정=강정은 약과 다식 등과 함께 제사상이나 잔칫상에 오르는 고유의 음식. 비자강정은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 종가에 내려오는 내림음식이다. 고산 선생의 종가인 녹우당 뒷산에 심어진 비자나무 500여 그루의 열매를 이용한 것이다. 비자 열매의 독특한 향과 쌉싸름한 맛이 특징이다.

오색꽃강정=안동 권씨 권벌 종가의 내림음식이다. 흰색, 노란색, 검은색, 붉은색, 분홍색 등 다섯가지 색깔의 강정인데, 붉은 색을 내는 자하초 우린 물이나, 노란색을 내는 치자 우린 물을 이용해 만든다. 종가의 이 음식은 마을 부녀회에도 전수돼 주문 판매한다.

연엽주=예안 이씨 문정공파 종가의 가양주다. 조상들은 제상에 올리는 술 향기로 후손을 확인한다고 해서 종가는 술에 많은 정성을 쏟았다. 찹쌀과 누룩 등을 발효시킨 연엽주는 충남 무형문화재 11호이며 시중에서도 판매된다. 이 집의 의례주가 소문이 난 것은 고종 때. 즉위 초기 나라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자 임금도 식사를 적게 했는데 당시 옥체 보존을 위해 주변에서 올린 약주가 연엽주였다.

설맞이 | 차례상의 진실

설날이 다가오면 주부들은 어김없이 명절 증후군에 시달린다. 갖가지 차례 음식을 준비하는데 진이 다 빠진다. 때문에 요즘은 20∼30만원대 가격으로 아예 제사상을 대신 차려주는 대행업체까지 성행하는 실정이다. 핵가족화 하면서 애써 마련한 제사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경우도 일쑤다.

그래서 격식만 남고 제사의 정신은 사라지고 있다는 소리가 나온다. 전례 전문가들은 "예의를 차린다고 해도, 골격만 남은 격식은 예(禮)에도 어긋난다"고 말한다. 예학이 형식과 절차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 근본은 마음가짐에 있다는 것이다. 황의욱 성균관 전례위원은 "정 형편이 여의치 못하면 정한수 한 잔을 올릴지언정 조상을 정성껏 모시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술 한잔, 차 한잔, 과일 한 접시

옛 기록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기제사(忌祭祀)나 시제사(時祭祀)와 달리 설날에는 남의 손을 빌려 차릴 만큼 많은 가지수의 과일과 음식을 꼭 올려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명절 차례는 해석이 분분할 정도로 기록이 명확치 않은데, 일반 제사에 준해서 올린다는 해석도 있지만 정식 예법에 있는 제사가 아니라 약식 제사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명절날 산 사람들끼리 즐겁게 지내기 미안해 조상에 인사하기 위해 마련한 예(禮)의 하나라는 것이다.

옛 예서에도 정월 초하루에 올리는 제수가 의외로 단촐하게 기록돼 있다. 사계 김장생(1548∼1631)이 편찬한 조선중기의 대표적 예서인 '가례집람(家禮輯覽)'의 정지삭망(正至朔望) 때의 도설을 보면 신주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술 한잔, 왼쪽에 찻 잔, 앞쪽에 과일 한 접시를 올려놓은 것이 전부다.

시제나 기제사 때 올리는 4∼5열의 상차림도 따지고 보면 일상적인 반상차림에 술과 안주, 과일 후식이 곁들여진 정도였다.

예서에서 오히려 제례의 근본으로 여겼던 것은 상차림이 아니라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이었다. 우암 송시열(1607∼1689)도 '계녀서(戒女書)'에서 "제례는 정성과 깨끗함이 으뜸이며 물 한 그릇이라도 빌리거나 얻어서 올리는 것이 아니다"고 가르친다. 한 전례 전문가는 "제수준비나 제수 비용 때문에 귀신을 원망하면 조상이 그 제수를 제대로 드시겠냐"고 말했다.

가족들의 축제

옛 예서는 설 차례보다 보통 사계절에 맞춰 음력 2월, 5월, 8월, 11월에 하는 시제를 제사의 으뜸으로 쳤다. 그러나 일년에 네차례나 제사를 올리는 게 어려웠기 때문에 시제는 쇠퇴해 갔고, 설이나 추석에 올리는 차례가 대신 시제의 성격을 갖게 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차례는 술을 한번만 올리고 축문을 사용하지 않는 등 정식 제사라기보다는 가족간의 축제 성격이 짙었다. 꼭 정해진 음식을 올리기보다 계절에 맞는 음식을 제상에 올리고, 이웃과 친지를 초대해서 화목과 우애를 다지며 푸짐하게 먹고 즐기는 날이었다. 먹을 것이 변변치 못했던 시절에 명절은 그래서 손꼽아 기다려지는 날이었던 셈이다.

명절은 또 종부의 음식 솜씨를 뽐낼 수 있는 날이었다. 각 가문들은 한 가지 재료로도 수십가지 요리법을 창출해내며 가문의 음식 솜씨를 자랑했다. 술도 제상에 올리기 위해 다양한 제조법이 개발됐다.

조선 중기 안동 장씨(1598∼1680) 부인이 기록한 '음식디미방'에는 가양주만 해도 50가지가 넘는다. 이연자 한배달 우리차문화원장은 "수 많은 제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고유의 음식문화가 전승되는 동시에 발전할 수 있었다"고말했다.

하지만, 좋은 것도 지나치게 마련. 조상에 대한 공경이 곧 가문의 경쟁으로 이어졌고 제사상을 통해 신분을 과시하는 경향도 생겨났다. 술 안주로 오르는 적을 어른 키만큼 높게 괴기도 했다.

자신의 형편과 살림에 맞는 제사

예부터 명절 차례 예법에 대한 해석은 조금씩 엇갈렸다. 제사의 기본으로 삼았던 주자의 '가례(家禮)'가 중국 문화와 관습을 토대로 한 것이다 보니, 우리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절에 드리는 차례(茶禮)란 말도 원래는 차를 올리는 의식에서 비롯됐지만, 중국에 비해 차가 흔치 않은 국내에서는 물이나 숭늉을 대신 올리게 됐다.

제사상에 탕을 올리는 것은 율곡 이이의 저서에서만 나온다. 주자의 '가례'에는 탕이 보이지 않는데, 한국의 음식문화가 탕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탕을 올리는 관례가 일반화했다. 예법도 일률적으로 정해진 원칙이 있다기 보다 시대와 상황에 맞게끔 변형돼 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조상과 가문이 쌓아온 전통을 함부로 바꿀 수는 없다. 우암 송시열은 제사에 날고기를 올리는 것이 옳다고 보았으나 가문이 대대로 익힌 고기를 써왔기 때문에 고치지 못한다고 했다고 전한다. 제사는 조상에 바치는 음식이어서 후손들이 함부로 고치지 못했던 측면이 강했다. 다식이나 식혜 등 우리 고유의 음식이 천년이 넘도록 보존됐던 것도 이 덕분이기도 했다.

전통과 변형의 갈랫길에서 전문가들은 전통의 관례를 따르되 잘못된 관습이라는 확신이 들면 시대에 맞게끔 합리적으로 변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또 허례허식보다 자신의 살림과 분수에 맞게끔 차릴 것을 권한다. 차례를 준비하는 정성과 깨끗함이 으뜸이 돼야한다는 사실이 만고불변의 원칙인 셈이다.

설맞이 | 경주 최씨宗家 김윤현 老종부

열흘 전부터 시작되는 설 준비

"힘든 거 많았지요. 17살 때 남편 얼굴도 모르고 시집왔는데 뭘 알겠어요. 뭐가 젤 힘들었냐고? 아휴, 기억이 하나도 안나요. 그냥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면서 견뎠어요."

팔순의 나이에도 얼굴에 어두운 그늘을 찾기 어려운 노종부(老宗婦) 김윤현(80) 할머니. 요즘 젊은이들은 상상만으로도 버거워하는 일을 60여년 계속해오면서도 어려운 일은 기억 하나 나지 않는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렇다고 고생한 기억이 왜 없겠는가. 재래식 부엌에서 허리 펼 날, 손 마를 날이 없었고 제사 때마다 양손에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20리 길을 걸어 다녀야 했을 터이다. 일곱 자녀와 시조부모 시부모까지 식사와 한복을 챙기는 일 모두가 노종부 몫이었단다.

그런 시어머니 앞에서 종부가 어찌 힘든 기색을 내보일 수 있겠는가. 햇빛이 잘 드는 툇마루에 앉아 시어머니는 차례에 쓸 상어를, 며느리는 요리에 쓸 마른 고추를 묵묵히 다듬고 앉았다. 묘하게도 둘은 동향 출신이다. "두 분서 고향인 안동 얘기 안 하시냐" 물으니 "한 번도 안 했다"며 웃음을 나눈다.

이제 장 보러 먼 길을 나서는 것은 종부 이동희(54)씨의 몫이 됐다. 이 날도 마른 고추를 방앗간에 가서 찧어 온다며 대문을 나서는 이씨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커다란 자루에 다듬은 고추를 가득 담아 차로 30분이 걸리는 칠성 재래시장으로 향한다. 돌아오는 길에 차례상을 위한 장도 조금 봐올 예정이다.

"썩지 않는 음식은 열흘 전부터 챙겨 두지요. 건어물은 깨끗한 놈으로 준비하고 생선은 손질해서 냉동실에 넣어 둡니다. 냉장고가 없었을 때는 2∼3일 만에 모든 걸 다 했는데, 어떻게 그랬는지, 제가 생각해도 신기할 따름이죠."

설과 추석에 사당에 올려지는 차례상은 모두 여섯 상. 아버지부터 고조부까지 4대, 불천지위(不遷之位·나라를 위한 공훈으로 사당에 영구히 모시는 것을 나라가 허락한 신위)로 모시는 백불암 선생과 그의 5대조인 대암(臺巖) 최동집 선생까지 포함한 것이다. '어찌 했는지 모르겠다'는 종부의 말을 최진돈씨가 거든다.

"그 때는 사람이 훨씬 많았지. 마을에 모여 살던 문중 부인네 수도 훨씬 많았고. 시설이 좋아지니 사람이 빠지고, 사람이 많을 땐 마땅한 기계가 없었고…. 공평한 것 아닌가."

해를 닮은 태양떡국

250명 문중이 모두 모이다 보니 떡국 준비하는 일도 차례상 못치 않은 거사다. 2년 전부터 단골 방앗간에 떡을 맡기기 시작, 손이 반으로 줄었지만 적어도 일주일 전부터는 준비를 시작해야 서운한 사람 없이 보낼 수 있다. 올해도 늘 가던 방앗간에 쌀 두 말을 맡겨두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쌀가루를 받아다 집에서 가래떡을 직접 쪘다. 김윤현 할머니는 그 전에는 아예 쌀을 불려 디딜방아에서 가루를 빻아 체로 치는 것까지 모두 집에서 했다고 말한다.

"아휴, 그 추운데 그걸 찧으려면 체가 얼어 붙기 일쑤였지. 그래서 화롯불을 옆에 두고 녹여가면서 했어요. 바람에 떡가루가 날아갈까 병풍까지 치고, 조상신 노한다고 떡 찔 동안 안방 아랫목에 여자는 앉지도 못하게 했다니깐."

쌀을 찌면 기운 센 장정들이 이를 떡메로 치고, 아낙들은 손을 호호 불며 바가지에 떠온 물을 떡메에 발라 반죽이 늘어지지 않게 했다. 다 친 떡은 가래떡 모양으로 둥글게 빚어 하룻밤 정도 두어 굳으면 손으로 썬다. 떡 준비하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최진돈씨네 떡국은 떡을 어슷한 모양이 아닌 둥근 형태로 써는 것으로 유명하다. 잘려진 모양이 둥근 해와 비슷하다 해서 '태양 떡국'이라 불린다.

"한 해 지날 때마다 동그란 해를 하나 먹는 거예요. 떡국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는 이야기 알죠? 해를 닮은 가래떡 때문에 나온 이야기 아닙니까."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해 고기나 멸치 국물이 아닌 맹물에 떡국을 끓인다. 묵은 장맛 덕분일까. 육수 없이도 고소하고 담백한 맛을 자랑한다. 차례상에 올린 떡국은 퍼지기 마련이나 모두 함께 먹는 떡국에 넣어 한 번 더 끓인 뒤 나누어 먹는다. 조상이 먹은 음식을 자손들이 나눠먹는 '음복'의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불은 떡국을 처리하는 종가의 지혜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문중 식구 250여명, 세배만 수십명

설 열흘 전쯤 찹쌀 다섯 되를 시장에 가져가 강정을 주문한다. 종가 특유의 차례용 별식인 피편(皮片)을 위해 정육점에 쇠고기 껍질도 부탁해둔다. 피편은 쇠나 상어 껍질을 푹 끓여 만든 일종의 묵이다.

이 밖에 마른안주, 즉 포와 밤·대추·감·배 등 4가지 과일과 미리 준비한 강정과 약과, 조기로 만든 식혜도 준비해 올린다. 바로 전날부터 지지기 시작하는 어적(漁炙) 육적(肉炙) 소적(蔬炙) 등은 차례상 준비의 가장 마지막 단계. 설 전날쯤 서울 사는 제수씨 두 명이 올라와 돕기 시작한다.

일년 16차례 모습을 드러내는 제기는 놋과 은이 섞인 것으로 백불암 선생이 처가에서 전해 받아 후손들에게 물려준 것이다. 처음 받은 것은 세 가마니쯤 되는 많은 양이었으나 일제 시대 두 가마니 분량은 공출을 당했다. 지금 남은 것들은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화를 면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나는 오전 11시부터 각자의 집에서 차례를 모신 문중 가족이 하나 둘 종가를 찾기 시작한다. 모두 모이는 낮 12시30분 전후로 차례를 지내고 떡국을 먹은 후 세배를 나눈다. 세뱃돈을 타내려는 아이들의 재롱에 조용했던 종가에 웃음이 퍼진다.

"아이들이 워낙 많으니깐 세뱃돈 준비하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1,000∼2,000원 넣어봐요, 유치원생도 거들떠 안볼 걸요. 수십 명이 모여서 세배를 하는데 이름까지 다 외우진 못해도 얼굴만 보면 어느 놈이 어느 집 손인지 대번에 알 수 있어요. 그거 맞추는 재미도 좋지요."

썩지 않는 집, 들고나는 사람

설 아침, 다른 이들이 모여들기 전 종가 식구들끼리도 세배를 나눈다. 가장 먼저 노모에게 세배를 하고 그 다음 부부가 맞절을 한다. 새해에도 서로 도와 잘 해보자는 의미가 담겼다. 마지막으로 자녀들의 절을 받는다. 최씨는 딸만 내리 다섯 낳은 후 아들을 보았다. 15대 종손인 아들은 이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최씨는 문중 식구가 모두 모이는 설, 추석, 시제 중 가장 생기 있고 즐거운 때가 바로 설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남자들은 연날리기, 제기차기, 자치기를 하며 즐기고 누이들은 숲에 매어놓은 그네를 뛰던 추억도 생생하다.

각 집에서 쌀 한 됫박씩 가져와 한 쪽에 쌓아두고 남자 대 여자, 혹은 종가를 중심으로 동가(東家) 대 서가(西家) 등으로 편을 갈라 윷판을 벌이던 기억도 즐겁다. 설에 '발동이 붙으면' 정월 한달 내내 윷가락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흥겨운 윷판은 소나무로 '달집'을 만들어 불을 붙인 후 춤추고 노는 '달불놀이'로 이어졌다. 새로운 한 해에 대한 기대와 희망 때문이었을까. 그 여느 명절보다 설은 힘찼다.

"그 때는 동산에서 서산까지 날아다녔는데 이제는 그럴 기운은 없지요. 380여년 된 기둥이랑 대들보는 썩지도 않고 그대로인데 사람들만 들고 나는가 봅니다. 어쨌든 지난 세월 해왔던 것처럼 올해도 힘내서 열심히 살아야지요."

/대구=글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사진 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설맞이 | 경주 최씨 종가내력

대구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거친 세월을 피해 세워진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옻골마을. 이 곳에 1616년 터를 잡은 이는 임진왜란 때 대구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워 공신이 된 대암공 최동집 선생이다.

뒤로는 팔공산이 둘렀고 앞으로는 멀리 금호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 마을 입구에서 바라보면 거북같이 생긴 '생구암(生龜岩)'이 정면으로 보이는데, 풍수지리학상 거북은 물이 필요하다 해 마을 입구 서쪽에는 연못을 팠다. 1,000년 후 자손까지 생각해 정성을 들인 탓인지 마을은 한국전쟁의 포화도 무사히 피해갔다. 고택은 대구지역 주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대구시는 이를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시냇가에 옻나무가 많아 '칠계(漆溪·옻나무 계곡)'라고 부른 데서 파 이름이 유래했지만 안타깝게도 옻나무는 자취를 감췄다. 몸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등산객들이 가지를 꺾어가더니 결국 뿌리까지 뽑아갔기 때문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종중회가 몇 해 전 뒷산에 옻나무 수십 그루를 심어 기르는 중이다.

대암공 선생은 조선조 17대왕 효종 시절에 대군의 사부로 천거받은 학자다. 그의 5세손이자 종가에서 불천지위로 받드는 백불암 최흥원 선생 역시 정조 때 세자 사부로 천거 받았지만 관직을 마다하고 평생 학문에만 힘썼다. 일찍부터 실학정신을 뿌리내린 학자로 유명한데 주민들에게 '부인동동약'이라는 일종의 계를 만들게 하고 그 돈으로 땅을 장만하게했다. '부인동동약'은 규약이 잘돼 있어 박정희 대통령 시절 새마을운동의 참고서적이 되기도 했으며 계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종가는 380여년 간 한번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종손의 큰아들로만 대를 이었다. 또한 문중 자녀에게 박사과정까지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65세 이상 노인들에게는 월 10만원의 용돈을 보태는 넉넉함도 자랑한다.

/김신영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