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14일 기자회견에서 외교부 직원들의 '부적절한 발언'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바로 안색을 바꾸었다. 노 대통령은 시종 단호한 어조로 인사조치가 공직기강 확립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이번 사건을 항명 성격을 넘어서, 대통령의 정책을 의도적으로 방해한 사보타지(태업) 수준의 사태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내비쳤다.회견을 지켜보던 외교통상부 관계자들은 폭탄을 맞은 듯 충격을 받은 분위기다. 더욱 당혹스러운 점은 이번 징계 결정 과정에서도 외교부가 사실상 배제됐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앞으로 협의해서 할 것"이라면서도 정보유출 실태 등을 열거하며 징계 결심이 이미 굳었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그 순간까지 외교부는 민정수석실의 조사보고서를 전달 받지도 못했다.
이에 대해 윤영관 장관은 이날 오후 브리핑에서 "민정수석실의 조사보고서를 받는 대로 노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응당한 징계를 하겠다"고 말했다. 윤 장관은 "대통령의 노선과 정책 방향을 실현하는 손과 발의 역할을 담당하고 이를 통해 국민에 봉사하는 게 외교부 직원의 사명"이라며 "국민께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 때문인지 윤 장관이 마음을 비웠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청와대가 조사와 징계를 사실상 주도, 장관의 징계권이 유명무실해진 데다 "직원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외교부 일각의 여론도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의 표명이 가져올 파장이나 윤 장관의 합리적 성격을 고려할 때 총선 전 사퇴는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대부분이다. 징계 대상자 중에 윤 장관이 높이 평가하는 직원도 있어 뒷수습을 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윤 장관은 이날 기자가 거취를 묻자 "이번 사건부터 정리하는 게 우선"이라며 직답을 피했다.
노 대통령이 이날 "대미 외교 과정에서 일부 문제된 공무원"이라며 북미 외교라인을 직접 겨냥함에 따라 이 부서를 중심으로 거센 인사 폭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소문도 확산되고 있다.
북미 외교 라인은 외교부 북미국·주 미 대사관 등에 근무한 외교부 직원들을 일컫는 말로 최고의 엘리트 코스이다. 징계 대상에 오른 조현동 과장과 위성락 북미국장도 주 미 대사관에 함께 근무했었다. 대미 외교를 독점한 일종의 '조직 내 조직'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파장이 클 수 밖에 없다. 외교부 내에 북미라인에 대한 질시나 비판적 인식이 많음에도, 징계 폭이 커지면 대미 외교의 기초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함께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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