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막막해요. 쫓겨나면 산 입에 거미줄 칠 판이니…."청소로 근근이 생활하는 홍명자(57·여)씨가 한숨을 토했다. "10평짜리 비닐하우스에서 겨우 추위는 면하고 있는데… 남편은 몸 져 누운 지 오래고…." 홍씨의 사연이 두서없이 계속되자 한 아낙이 "그러니까 투쟁하는 거여" 하곤 세입자대책위 가입 신청서를 내민다. 11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낙생농협 광장. 판교주민대책위가 마련한 '주민의 날' 행사를 맞아 무거운 발걸음이 쉼 없이 이어졌지만 이들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살 길은 열어두겠지" 하고 믿었던 주민들은 "투쟁은 이제부터"란 확성기 외침에 그 동안 미뤄뒀던 대책위 가입서류를 꺼내 들었다.
대책위도 주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통별 조직을 강화해 세입자 생계대책 마련 등 적극적인 보상 요구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며 그 동안 토지 보상 때문에 묻혀왔던 세입자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 16일 연대집회 등 집회 일정도 줄줄이 잡아놓았다.
지난해 투쟁이 토지 소유주 중심이었다면 주택, 공장 등 지정물 보상 감정평가에 들어가는 이 달 중순부턴 본격적인 세입자 투쟁을 예고하고 있는 것.
지난해 말 시작된 판교 신도시 토지 보상은 40.7%(4,963억원)로 비교적 순조로운 편. 200억 원대 보상을 받은 땅부자와 부동산 투기로 대박을 터뜨린 외지인의 성공담도 들린다.
하지만 세입자란 꼬리표 때문에 올해 말 철거가 시작되면 길거리로 나앉을 1,500여 가구(대책위 추산 2,300여 가구) 5,000여명은 돈벼락 대신 생존권 위협이란 된서리를 맞고 있다. "막말로 조상 잘 둔 벼락부자가 얼마나 됩니까. 몇 사람 성공 때문에 몇 천명이 집도 절도 없이 희생할 수 없다"는 게 세입자들의 주장이다.
현재 한국토지공사 등의 보상안은 세입자가 주거 이전비 또는 임대아파트 입주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 그러나 월평균 가계지출 기준인 주거 이전비는 4인 가족 기준 800만원도 안되고 임대아파트는 분양대금을 마련한다 해도 2007년께 입주가 가능한 그림의 떡이다. 김모(47)씨는 "직장이 근처라 멀리 갈수도 없고 분당에 방을 얻는다 해도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60만원짜리가 보통"이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생활보호대상자로 월세 몇 십 만원짜리 단칸방에서 삶을 유지하는 노인들은 딱하기만 하다.
비닐하우스 등 무허가 건물을 빌려 생활하는 사람들은 주택 셋방살이 처지는 그나마 낫다고 하소연이다. 1989년 1월24일 이전에 지어진 비닐하우스만 가옥으로 인정, 보상 받기 때문. 10평짜리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민복순(59·여)씨는 "가진 게 없어 여기까지 흘러와 6년이나 살았는데 보상 한푼 안 해주고 투기꾼으로 모는 게 말이 되냐"며 한숨을 쉬었다.
120여 개 무허가 영세공장과 개, 토끼 등을 키우는 축산농가들도 역시 세입자 신분이어서 사정은 마찬가지다. 영세공장주들은 신도시 내에 벤처단지를 조성해도 폐비닐 재생, 가구 소품 제작 등을 하는 자신들은 입주도 할 수 없는 처지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월세 30만원에 직원 한 명 없이 방석공장을 운영하는 김용효(51)씨는 "공장 이전 비용으로 5톤 트럭 한 대분인 25만원이 말이 되느냐"고 불평했다. 개를 키우는 농가는 "소음과 냄새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다"고 걱정이다.
보상이 이뤄지고 있는 땅 주인들의 불만도 차츰 커지고 있다. 실제 보상을 받아 주판을 굴려보니 농협 빚 갚고 나면 빈털터리가 되는 계산을 뒤늦게 한 소규모 땅 주인들도 11일 따로 모임을 가졌다. 판교주민대책위는 이들과도 연대투쟁을 벌인다는 계획이다.
한국토지공사 관계자는 "세입자들이 요구하는 이주 단지는 전기 가스 통신 도로 수도 등 생활기본시설을 모두 갖춰야 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렵고 무허가 영세공장은 시절 이전비 지원 외엔 방법이 없다"며 "협의를 거쳐 세입자에겐 임대아파트 입주 전까지 주거 이전비를 무이자로 빌려주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남=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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