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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36> 창(窓)을 향해 열린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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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36> 창(窓)을 향해 열린 마음

입력
2004.0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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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문명(文名)을 날렸고, 돈과 명예를 한 몸에 갖게 된 사람이 있다. 중년의 나이에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일이 싫어진 그는 부인에게는 돈을 주고 대신 자유를 얻는다. 그에게 남겨진 것은 20달러 짜리 지폐가 가득찬 구두 상자와 책 몇 권, 음반 두 세 장이 고작이었다. 남자는 파도 치는 바다로 간다. 이제 조그맣고 허술한 오두막집이 그의 안식처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리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게 남자의 하루다. 그는 모래톱에 쌓인 조개껍데기를 주워 창가에 쭉 늘어 놓는다.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넓고 넓은 바닷가에'에 나오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자신의 명성과 부를 하루 아침에 던져버린 남자. 바다를 향해 떠난 그처럼 모든 걸 훌훌 털어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는 게 내 가장 큰 소망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연극에 관한 한 욕심꾸러기지만 그것 말고는 별 욕심이 없는 편이다. 보석반지,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차. 그런 것에 대한 소유욕은 나와 철저히 무관하다. 화장이나 머리 만지는 것도 할 줄 모른다. 그러나 유달리 소설 속 남자만큼은 부럽다. 누가 뭐래도 내게는 그럴 용기도 자신도 없다는 걸 잘 아니까.

실제 일상으로부터 탈출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향해 열린 나무로 된 작은 창(窓) 하나만은 꼭 갖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하나 어려울 게 없는 이 꿈을 나는 나이 오십이 다 돼서야 이뤘다. 나는 자라면서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니 '창'이란 건 언감생심이었다. 그 창을 시집가서 처음 가져봤다. 용두동 집 우리 부부의 방은 별채 위층에 있었는데 여름엔 해를 머리에 인 것처럼 뜨겁고, 겨울에는 석빙고보다 더 추웠다. 그러나 봄이면 방안으로 감나무 여린 잎이 삐죽이 고개를 들이밀고 하늘과 청정한 공기의 냄새가 밀려오는 창 때문에 그 여름과 겨울을 견딜 수 있었다. 나는 가지를 자를 생각도 못하고 내 창으로 들어온 나뭇가지를 그립게 맞이하곤 했다.

그 후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베란다가 딸린 내 문간방에서는 더 이상 해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꼭 커다란 창을 원하진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작아도 해가 지는지,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는 알고 싶었다. '웬일이세요, 당신'을 할 때도 그랬다. 충분히, 실컷 가져보지 못한 창을 무대에서라도 가져보고 싶었던 나는 무대 미술하는 박동우씨에게 부탁해서 창 하나를 얻었다. 연극 속에서 독백을 하는 동안 괴로운 상념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창 때문이었다. 창은 나의 기도였다.

그리고 다시 논현동의 한 단독 주택으로 이사했다. 시부모님이 안방을 쓰시고, 아이들은 방 하나씩 써야 하니까 우리 내외는 반지하실로 밀려났다. '남향으로 반듯하게 난 창을 가지고 싶은 것뿐이었는데 내 나이 오십이 넘도록 내 창이 하나 없구나. 인생 참 헛살았다.' 실망이 지나쳐 거의 비관적이 됐다.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나자 내 안의 파쇼가 폭발했다. '고3 때나 저희들 위해 방을 내줬지.' 그래서 집수리를 하면서 나는 남편과 아들을 한 방으로 몰고, 딸 아이를 조금 환한 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나서야 딸이 쓰던 방을 차지할 수 있었다.

나는 감격했다. 북향이었지만 그 창으로 보일 건 다 보였다. 가끔 조그만 외등이 달린 대추나무엔 새도 와서 울었다. 나는 나의 창 밖에 제라늄 화분도 줄줄이 늘어놓고 싶다. 그건 내 마음의 창이다. 창 하나 갖지 못한 채 오랫동안 위로 받을 길 없었던 나는 그제서야 바람이 통하는 내 마음의 통로를 얻었다. 나 혼자 좋자고 남편과 아들을 반지하실에 처박았다는 가해자 의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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