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업이 전 세계 기업의 허를 찔렀다. 외국자본의 도움으로 기반을 잡고, 선진기업에게 착실히 기술을 사사(師事)하며 성장해왔던 중국 기업이 이제 세계 챔피언 등극을 눈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세계시장 개척을 위해 해외 생산기지를 잇달아 설립하고, 과거 선진기술을 조심스레 쥐어 주었던 세계 중견 기업들을 오히려 인수·합병(M&A)하면서 무서운 속도로 덩치를 키우고 있다.
32세 나이에 건자재·가전 분야 7개 회사를 거느리며 중국 재계 서열 15위 그룹의 총수가 된 스더(實德)그룹 슈밍 총재. 4,000억원대 자산가인 그는 지난해말 적자에 허덕이는 한국 프로축구단 부천SK를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이어 잉글랜드의 축구 명문 리즈 유나이티드도 사겠다고 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부천SK가 스더에 인수되면 한국 프로구단에 대한 국제적 인수·합병의 첫 테이프를 중국 기업이 끊는 셈이다. 스더의 이 같은 행보가 글로벌 비즈니스를 위한 전략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한국에서 구조조정 매물로 나왔다가 중국 기업이 덥석 물어버린 사례는 프로축구 뿐이 아니다. 지난해 초 하이닉스반도체의 자회사 하이디스가 중국 기업에 인수됐고, 지난해 말 쌍용자동차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중국의 난싱(藍星)그룹이 선정됐다.
하이디스를 인수한 중국 BOE테크놀러지 그룹의 성장과정을 보면, '외국자본의 블랙홀'이던 중국이 세계적 투자대국으로 성장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정밀부속품 제조업체에 불과했던 BOE는 일본 마쓰시타와 합작으로 브라운관 제조에 뛰어들었고, 이어 세계 2위 모니터 업체인 홍콩 TPV와 합작을 통해 액정표시장치(LCD),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모니터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이후 자체기술로 노트북과 디지털 카메라 제조에 진출했다.
이렇게 성장한 BOE가 지난해 합작관계였던 TPV를 인수하고, 이어 하이디스까지 집어 삼키면서 세계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분야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외국기업과의 합작→기술 이전→사업 확장→외국기업 사냥'이라는 중국 기업의 전형적인 발전모델을 보여준 셈이다. BOE 쭝후이펑(仲慧峰) 이사는 "합작기업을 설립할 필요 없이 선진기술과 해외 정보를 통째로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 기업은 해외 알짜기업 M&A를 선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기업에 역습을 당하기는 유럽,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휴대폰 제조업체 TCL은 지난해 독일 TV제조업체 '슈나이더 알렉트로닉스'를, 중국 섬유메이커인 지아러그룹은 일본 가네마쓰섬유를 인수했다.
2002년말 현재 공식적인 중국의 해외투자(ODI) 누계액은 299억달러이지만,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투자액까지 포함하면, 2001∼2003년에만 2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2010년이면 연간 100억달러에 달할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하이얼 렌샹(聯想) TCL 등은 '2050년 브릭스'라는 말이 미안할 정도로, 이미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하이얼은 미국 등 세계 11개국에 생산기지, 연구개발(R&D)센터를 운영하며 세계 백색가전의 최강자로 등극했고, 렌샹은 델과 휴렛팩커드 등을 제치고, 아시아 컴퓨터시장을 석권했다. TCL은 프랑스 최대 가전업체 톰슨과 합작회사를 설립, 삼성전자를 제치고 세계 최대 TV 메이커로 부상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이 선정하는 세계 500대 기업 숫자를 보면 한국(13개)이 6년째 제자리 걸음인 반면 1997년 3개였던 중국은 지난해 11개가 포함됐다. 중국의 세계 점유율 1위 제품은 미국 다음으로 많다.
삼성전자 중국법인 김해룡 부장은 "요즘은 중국 기업들이 한국, 일본 기업을 무서워하지를 않는다"며 "기술격차도 2∼3년에 불과, 신제품을 출시하면 금방 따라온다"고 말했다.
상하이사회과학원 자오뻬이원(趙文) 연구원은 중국 기업의 성장에 대해 한마디로 '개방화의 위력'이라고 설명했다. 개방화 바람을 타고 들어온 외국자본이 선진 경영기법을 전파하고, 인재도 육성하면서 중국 기업의 고성장을 견인했다는 얘기다. 최근 중국 자본의 글로벌 경영 전략(저우추취·走出去 정책)이 본격화할 수 있는 것도 과거 외자유치 전략(인진라이·引進來 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80, 90년대 한국이나 일본의 세계화 과정은 중국과 비교하면 반쪽짜리에 불과했던 셈이다.
/베이징·상하이=유병률기자 bryu@hk.co.kr
중국 기업 못지 않게 중국 대표 도시들의 세계적 허브(Hub)로 향한 질주도 가속화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중순 베이징 순환도로 곳곳에는 '당신만의 사무빌딩을 가지세요'라는 광고판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중국의 '실리콘밸리'인 중관춘(中關村) 관리위원회와 영국 건설업체의 합작으로 베이징 서남쪽에 조성되는 100여만평 규모 비즈니스 센터(종뿌지띠·總部基地) 건립을 홍보하는 것이다.
이곳에는 내년말까지 6∼12층짜리 건물 1,000여 동이 들어선다. 종뿌지띠 쉬웨이핑(許爲平) 회장은 "중국에 들어온 세계 각국의 기업과 중국 본토기업 모두가 자신만의 건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규모를 6∼12층으로 제한했다"며 "1,000여개 국내외 기업의 중국 본사가 입주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대료도 베이징 중심가의 3분의1인 1㎡당 8,000위안(120만원)으로 책정했다.
이곳에는 국제전시센터, 비즈니스호텔 등은 물론, 세계적 병원과 3개의 대형할인점, 베이징대와 칭화대의 경영학석사(MBA) 교육센터, 아파트촌 등 각종 편의시설과 교육시설도 입주할 예정이다. 녹지율을 50%로 끌어올리는 한편 인근에는 골프장도 건립한다는 계획이다. 싱가포르처럼 환경친화적 원스톱 생활권을 만든다는 구상이다.
이 같은 계획과 함께 베이징시는 2008년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총 1,800억위안(27조원) 투자, 베이징을 세계적 도시로 육성한다는 구상이다. 여기에는 세계적 금융도시가 수도를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점에 착안, 베이징을 국제금융중심지로 발전시키는 전략도 포함돼 있다.
베이징과는 경쟁관계인 동시에 협력관계인 상하이도 2010년 세계박람회 개최를 계기로 세계 도시로 부상한다는 구상. 최근 상해시발전연구중심은 상하이를 루쟈주이 금융지구 등 1개 성장점과 5개 산업벨트 권역으로 재구성한다는 발전전략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해 세계 최초로 무인 자기부상열차 개통, 푸동공항과 시내 중심부를 연결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특히 지난해 상하이항은 부산항의 처리 물량을 제치고 세계 3개 컨테이너항으로 올라섰다. 상하이 앞바다에 위치한 섬 '양산(洋山)'의 심수항만은 올해부터 일부 가동에 들어가며, 5단계 개발이 끝나는 2020년에는 세계최대 규모가 된다. 상하이시물류학회 추슈에지엔(雪儉) 부회장은 "양산 심수항 건설로 대형 선박들도 상하이 정박이 가능한 데 세계 선사들이 굳이 부산항을 경유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베이징·상하이=유병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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