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5일 치러지는 17대 총선을 앞두고 시민단체의 당선·낙선운동이 다시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지난 총선이 '바꿔' 열풍이 일었던 낙선운동 일색이었다면 이번에는 자체 선정한 후보군을 지지하는 당선운동이 추가됐다. '양날의 칼'로 자리매김할 시민단체의 당선·낙선운동은 파급력이 이전에 비해 훨씬 배가될 전망이다. 더구나 정치권의 검은 비리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정치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때보다 커 시민들의 당선·낙선운동에 대한 지지가 상당히 높을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런 만큼 정치권 안팎에서는 찬반 여론이 분분하다. 불법 시비와 함께 특정 정파와의 교감설마저 제기되는 형편이다. 하지만 각 시민단체들은 아랑곳 하지않고 4·15 총선을 향해 강행군을 거듭하고 있다.불법요소 배제한 합법운동 강조
맑은 정치 여성네트워크는 8일 당선운동 대상 여성후보 100인의 명단을 제시했고, 생활정치네트워크와 국민의 힘 등도 지역구별로 1명의 당선운동 대상자를 확정해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 공개할 예정이다. 정대화 상지대 교수와 최열 환경운동연합 대표, 김동완 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 등이 추진하는 '2004년 총선 물갈이 국민주권연대'도 15일 발족과 함께 대대적인 활동에 나선다.
물갈이연대는 온라인상에서 사이버 선거인단을, 오프라인에서 선거구별로 100명씩의 유권자위원회를 만들어 여기서 토론-평가-후보선택 등의 과정을 거쳐 최종 후보군을 확정한다는 로드맵을 세워놓고 있다. 후보군은 중점지지후보와 개혁후보, 클린후보 등으로 구분되며 선거일에 임박한 4월초 전국 227개 지역구별로 이른바 '국민후보'를 선정 발표할 계획이다.
12일 낙선운동을 선언한 참여연대도 낙선 대상자 기준을 만들어 3월말께 전체 리스트를 발표할 계획이다. 김기식 사무처장은 "체포동의안 부결 이후 국회의 도덕성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낙선운동에 다시 뛰어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시민단체들은 지난 총선의 낙선운동에서 불법으로 판정된 가두 홍보 및 캠페인 등을 배제하고 철저히 합법적인 틀 속에서 인터넷 중심의 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객관성·공정성이 열쇠
당선·낙선운동를 둘러싸고 "시민들이 직접 선거에 나선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객관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회의적인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정당별로도 평가가 제각각이다.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특정세력을 위한 불법운동 개연성이 있다"고 경계했고, 열린우리당은 "깨끗한 정치를 위한 시민단체의 결단"이라고 옹호하고 나섰다. 민주당은 "선거법 테두리 안에서의 운동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중립적 입장이다.
반대론자들은 온라인상에서 이뤄지는 당선후보 선정과정에서 50, 60대 장년층이 외면받을 수밖에 없고, 비 네티즌의 의견을 수용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점을 지적한다. 낙선운동의 경우 특정 정파 중심으로 흐를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다. 여기에는 주도층의 이념적 성향이 진보·개혁 쪽에 가까워 '여권도우미' '청와대 음모설'이라는 의혹어린 시선을 받는 부분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은 이 같은 배후설을 완강히 부정하고 있다. 보다 많은 정보를 유권자에게 주자는 취지일 뿐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는 계층이 오히려 물갈이 대상이라고 항변한다. 이 때문에 보수진영에서도 맞불성 당선·낙선운동에 나설 기미가 있어 자칫 시민단체간 보·혁대립마저 우려되는 상황이다. 결국 '국민후보' 및 '낙선대상' 선정과정의 객관성·공정성 여부가 이번 운동 성패의 열쇠로 남는다.
/염영남기자 liberty@hk.co.kr
박은형기자 voice@hk.co.kr
● "물갈이연대" 정대화 교수
"이제는 당선운동입니다."
2004년 총선 물갈이 국민연대 결성을 주도하고 있는 정대화(사진) 상지대 교수는 "16대 총선에서는 특정 후보를 겨냥한 낙선운동을 주도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정치발전에 이바지하는데 한계가 있었다"며 "이번에는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후보를 정하고 지지운동도 함께 벌이는 포지티브식으로 전환, 보다 진일보한 시민운동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15일께 물갈이연대 발족과 함께 인터넷 사이트(www.mulgari.com)를 열고 본격적인 당선운동 행보에 나설 방침이다.
물갈이연대는 도덕성 참신성 개혁성 전문성을 토대로 자체 선정한 '국민후보'를 공개하며 지지운동도 시민들과 함께 온·오프라인에서 병행해 벌일 계획이다.
정 교수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불공정성 시비에 대해 "지난 총선에서의 낙선운동이 단체들의 연합이라면 이번 운동은 개인들이 참여하는 시민들의 네트워크 방식"이라며 "이 때문에 누가 국민후보군에 포함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인데 벌써부터 특정 세력과의 연계설을 운운하는 것은 명예훼손감"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불법성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인터넷 활동과 기자회견 등 철저히 합법적으로 진행해 국민들이 정치권 심판을 보다 올곧게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는 말로 대신했다.
● 16대 낙선운동
2000년 16대 총선에서 선보인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은 주변인 위치에 머물던 유권자가 스스로 선거 일선에 뛰어들어 정치개혁의 첫걸음을 내딛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실제 결과에 있어서도 총선시민연대가 발표한 낙선대상자 86명중 59명이 고배를 마셨고, 특히 집중낙선대상자(22명)의 경우 68.2%인 15명이 금배지를 달지 못했다. 헌법재판소와 중앙선관위원회는 낙선운동은 합법이지만 피켓팅이나 가두 홍보 등의 행위는 불법이라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이런 위법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앞둔 현실 정치인들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견제세력으로 등장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결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당별로는 한나라당이 28명의 대상자중 9명이 낙선했고, 민주당은 16명중 12명, 자민련은 18명중 17명이 떨어졌다. 또 민국당과 무소속 및 기타 정당에서는 각각 7명중 6명, 17명중 15명이 당선되지 못했다. 지역별로 보면 수도권에서는 낙선대상자 20명중 단 1명을 제외한 19명이 탈락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지만 낙선대상자가 가장 많았던 영남권에서는 35명중 16명만이 낙선해 지역주의의 높은 벽을 허물지는 못했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낙선운동의 성공으로 정치인은 유권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됐으며 정치권이 스스로 깨끗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인식케 했다"고 호평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평가 이면에는 낙선운동 자체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점도 숙제로 남았다.
낙선 대상자의 선정기준이 모호해 상대적으로 대상자가 많았던 한나라당은 '여권의 2중대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 낙선운동이 대상자들의 합리적인 비판 외에 무조건 약점만 부각시키는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일관한 점도 옥에 티로 작용했다.
/염영남기자
● 외국 사례
미국 캐나다 독일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시민단체가 특정 정치인에 대해 낙선 또는 지지운동을 벌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일본에서도 우리를 모방한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장 활발히 진행되는 미국은 각종 시민단체들이 선거를 앞두고 의원들의 의회 속기록과 각종 법안의 투표기록을 분석, 의정활동을 점수화해 유권자에게 제공한다. 수도인 워싱턴에만 200여개의 유권자 단체가 활동하고 있으며 환경보존유권자연맹(LCV) 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AFL-CIO) 의정활동감시단(Congress Watch) 등이 주요 단체로 알려져 있다. 이 단체들은 선거기간 TV광고와 전화공세 등을 통해 낙선대상자들을 집중 공략한다. 최근에는 억만장자 조지 소로스가 연말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낙선을 위해 시민단체에 1,000만달러를 기부해 화제가 됐다.
독일은 환경·소비자·인권단체들이 해당 분야의 정당정책을 평가하고 지지정당을 선택한다. 여기서 의원 개개인이 특정 분야에서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등의 의정활동 정보를 낱낱이 공개하며, 부적격 인물에 대해서는 낙선운동에 나서기도 한다. 영국도 시민단체의 낙선·지지운동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선거운동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국가의 시민단체 선거운동은 우리처럼 포괄적으로 당선·낙선대상을 정해 활동하는 것보다 담당 분야에 국한해 입장을 정리하는 경우가 더 많다. 환경단체는 반 환경정책에 앞장선 의원을, 인권단체는 인권정책에 소홀한 의원을, 반전단체는 전쟁지지 의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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