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도 없다." 이런 농담을 하며 친구를 데리고 이 집을 찾는 단골도 적지 않다. 이 말은 본디 노력의 대가로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부정적 의미를 머금고 있다. 그러나 하동관(河東 )에선 그 뜻이 사뭇 달라진다. 과장을 조금 보태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말끔히 비울 만큼 맛이 뛰어나다는 역설의 의미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손님의 입이 음식 맛을 판정하는 심판이지요. 맛이 달라지면 손님이 먼저 알게 마련입니다." 하동관대표 장석철(張錫喆·65)씨는 손님을 가장 공정한 심판으로 여긴다. 그 역시 매일 오후 1시 반이면 곰탕을 든다. 그 날의 맛을 손님 입장에서 감정하는 시간이다. 짓궂은 손님은 "더 맛있어 보이는데 바꿔 먹자"고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하동관의 식단은 단 한 가지, 곰탕뿐이다. 부족하다 싶은 사람은 수육을 추가한다. 광우병 파동도 여기서는 먼 남의 나라 일처럼 보인다. 주방에선 직경 1m가 넘는 가마솥 3개에 담긴 진국이 손님을 기다린다. 가마솥 1개에서 150∼200인분 정도 나온다. 찬도 달랑 깍두기 한 가지다. 곰탕과 깍두기는 궁합이 잘 어울리는 음식이다.
'깍국'을 부어 다소 느끼한 맛을 씻어내기도 한다. 깍두기 국물을 줄여 그렇게 부른다. 놋그릇을 고집하는 것도 이 집만의 특징이다. 요즘은 기계를 사용하지만 예전에는 영업이 끝난 뒤 종업원은 물론 온 식구가 나서 새끼줄에 기와 빻은 가루를 묻혀 닦아냈다.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60년 전통 한우만을 고집합니다.' 벽 여기저기에 표어처럼 써서 붙여 놓은 문구다. "반세기 넘게 거래해온 종로의 정육점이 있습니다. 우리 식당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됐는데 전국에서 가장 좋은 한우를 취급하는 정육점으로 유명합니다. 곰탕은 한우 중에서도 암컷의 정육을 써야 제대로 맛이 우러납니다." 장사장은 이젠 손으로 만져 정육이 한우의 암컷의 것인지 아니면 수컷의 것인지 정확하게 감별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단점은 느긋하게 즐길 수 없다는 점이다. 식권을 들고 줄지어 서 있는 손님들을 보면 맛을 음미하겠다는 생각은 감히 들지 않는다.
서울 중구 수하동 26번지, 대지 100평에 들어 앉은 비교적 넓은 공간이지만 단층이라 한 번에 수용 가능한 손님은 100여명 정도. 증축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더니 "손님 때문에 장기간 문을 닫을 수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심지어 내부 수리나 도배도 인건비를 몇 배나 더 주고 설이나 추석 등 명절에 한다.
하동관은 저녁장사를 하지 않는다. 매일 일정한 분량의 음식을 준비하기 때문에 모자라면 모자랐지 남은 적은 없다. 아침 7시에 문을 열어 보통 오후 4시 반이면 영업이 끝난다. 곰탕이 떨어져 낮 12시 반에 문을 닫은 날도 있다.
"밥 굶지 않고 자식 공부시키면 됐지 더 바랄 것이 무엇 있겠나." 장사장의 선친(張樂恒·장락항)은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장사장은 "큰 욕심을 냈다면 왜 저녁 장사를 않겠습니까. 더구나 요즘은 조금만 이름이 나면 분점을 내는 게 유행인데 우리는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맛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 말한다. 그의 서랍에서는 숱한 명함이 잠자고 있다. 일부러 한국에 나와 며칠씩 조르다 빈 손으로 간 해외동포도 많다.
하동관의 창업자는 고 김용택(金容澤)씨. 39년 지금 자리에 문을 열었다. 인쇄업 등을 하던 그는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음식장사에 뛰어들었다. 하동관이란 상호는 그의 어머니가 역술가를 찾아가 받은 이름이란다. 역술가는 "무조건 이 상호를 내걸면 돈을 번다"고 작명을 해주었다.
김씨와 교분이 두터웠던 장사장의 선친은 64년 하동관을 인수했다. 제법 맛 좋기로 소문이 오르내리던 무렵이었다. 그 명성을 확장한 주인공은 손맛이 뛰어난 장사장의 모친(洪昌錄·홍창록)이었다.
"어머니의 손이 닿았다 하면 맛이 달라진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장사장은 대학졸업 후 일년간 선친을 도와 손님 시중을 들었다. 이후 30여년간 섬유사업을 하다가 2년 전 큰 형의 뒤를 이어 부인 임정옥(林貞玉·59)씨와 손님을 맞고 있다.
사실 하동관의 얼굴은 지배인 강복형(姜福馨·64)씨와 주방장 권혁녀(權赫女·65)씨다. 강씨는 48년째 하동관의 대소사를 챙기고 있고 권씨도 30년 넘게 주방을 지키고 있다. 단골들은 강씨의 얼굴이 안보이면 의아하게 여긴다. 장사장의 모친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권씨에게 맛의 비법을 모조리 전수했다.
하동관 곰탕을 즐겨 들지 않은 역대 대통령은 없다. 특히 고 박정희 전대통령은 누구보다 좋아했다. 연초 초도순시 때 제주도까지 경호실에서 공수할 정도였다. 김대중 전대통령도 청와대 주인이 되기 전 자주 찾아왔다. 그 때마다 종업원들에게 천원짜리 새 돈을 봉사료로 주며 격려하곤 했다.
60년대 한국인의 우상이었던 프로레슬러 김일, 한국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고 김기수씨도 곰탕 맛에 푹 빠졌다. '나홀로' 단골도 많다. 점심 상대가 없거나 입맛이 없으면 혼자서 찾아온다. 52년 단골도 있다. 올해 여든 둘인 이 노신사는 아예 매일 점심을 여기서 해결한다.
장사장의 희망은 하동관이 언제나 손님 곁에 존재하는 것이다. 큰 아들 민하(旻河·30)씨는 직장을 그만 두고 올해부터 대물림 수업을 하고 있다. 하동관 곰탕으로 배를 달래면 머리도 즐겁게 웃는단다. 단골들의 밉지 않은 아첨이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쇠고기·내장 "푹" 고아 국물내
곰탕은 설렁탕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일품(一品)요리다. 한 가지로 최상의 맛을 내는 음식인 것이다.
두 음식의 경계가 모호해져 가는 게 요즘의 현실이지만 맛을 좌우하는 국물을 우려내는 주체가 서로 다르다. 곰탕은 쇠고기와 내장이 주체가 되는데 반해 설렁탕은 뼈가 국물 맛을 좌우한다. 조선시대 수라상에는 곰탕이 팥밥의 짝으로 반드시 올랐다. 그런 사실로 볼 때 곰탕이 귀족적이라면 설렁탕은 보다 서민적 음식인 셈이다.
곰탕의 조리법은 설렁탕에 비해 좀 더 까다롭고 손질을 많이 필요로 한다는 것이 요리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우선 곱창은 질긴 막을 벗겨내고 양(소의 위)은 끓는 물에 튀기듯 삶아 검은 부분을 제거한다. 곤자소니(소창자 끝의 기름기 많은 부위)는 소금으로 잘 문질러 점액질을 없앤 다음 양지머리나 사태살 등을 끓는 물에 넣고 국물이 우러날 때까지 푹 곤다.
처음엔 센불, 국물이 우러난 뒤에는 중간불로 잘 조절해야 한다. 곰탕은 설렁탕과 달리 조리과정에 양념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곰탕 고유의 구수한 맛을 내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곰탕은 구수하고 담백한 국물이 맛의 생명인 만큼 곰탕업소들은 조리과정은 물론이고 조리법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기업비밀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육탕(肉湯)으로도 불리는 곰탕은 대표적인 보양식이다. 유래는 고기를 맹물에 넣고 끓인 국이라는 의미의 공탕(空湯)과 고기를 넣고 푹 곤 국이라는 의미의 곰국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조선 중종22년(1527년) 간행된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탕은 국에 비해 국물이 진한데다 공이 많이 들어가는 진귀한 음식'이라는 기록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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