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노동력을 밑천으로 세계의 생산기지 역할을 해온 중국이 세계의 소비시장으로 변모하고 있다.13억이라는 인구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10여년간 8%대 고성장은 중국 부유층을 급속히 팽창시켰고, 소비수준도 고급화했다. '중국 시장에서 살아 남으면 세계 시장을 제패한다'는 말은 중국에 진출한 세계 기업들에게 좌우명처럼 돼버렸다.
인구 800만명이라고 하지만 한국의 여느 중소 도시에 온 것 같은 중국 저장(浙江)성 원저우(溫州)시. 국내총생산(GDP) 순으로 중국 23번째 도시에 불과하지만, 이곳에는 재산이 1억위안(약 150억원) 이상인 주민들만 최소 200명이다. 이들은 안경테와 신발 등을 수출해 큰 돈을 벌었고, 이중 일부는 서울 남대문시장에도 상가를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판매된 벤츠와 BMW만 1,000여대. 삼성전자가 지난해 이곳에서 판매한 TV 10대 가운데 8대가 수만위안(수백만원) 짜리 프로젝션 TV였다.
올해로 중국 정부의 개방화 선언 26년째. 중국의 웬만한 성, 시는 이처럼 세계 기업들이 목숨 걸고 파고 들어야 할 거대시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중국 통계당국에 따르면 중국의 소비재 판매시장은 2002년 기준 4,947억달러(600조원). 시장 쟁탈전이 가장 치열한 전자제품 소비시장 규모만도 연간 70조원이다. TV 냉장고 등 가전부문 연간 판매대수가 1억2,000만대(39조원), 컴퓨터가 1,400만개(15조원), 휴대폰이 5,500만개(16조원) 등이다. 휴대폰만 보면 전 세계 이용자 6명중 1명은 중국인이다.
물량도 물량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도 중국은 더 이상 싸구려 시장이 아니다.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 등 5대 대도시의 휴대폰 보급률은 75%에 달하며, 지난해 이곳에서 판매된 휴대폰의 절반은 카메라폰, 컬러폰이었다. 또 삼성·LG 등 국내 전자업체의 지난해 매출가운데 50%는 액정화면(LCD)·플라즈마(PDP)·프로젝션 TV 등 한국의 중산층도 쉽게 살 수 없는 프리미엄급이었다.
삼성전자의 애니콜이 최고의 휴대폰으로 인정 받고, 농심의 '신라면'이 베이징 까르푸 매장에서 단일품목으로 매출 1,2위가 된 것도 품질과 함께 경쟁사보다 2배 이상 비싼 가격 때문이었다. 자동차 판매량은 자동차 종주국 독일을 제쳤고, 중국 최대 쇼핑가인 상하이 난징루(南京路)의 연간 매출액은 유럽 최대 번화가인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와 비슷한 20억달러 수준이다.
그만큼 중국인들이 부유해졌다는 얘기다. 중국 대도시에는 50평 이상 대형 평수 아파트 공급이 쏟아지고 있고, 골프 인구가 100만명에 달하면서 골프용품 시장 규모가 아시아 2위로 성장한 것이 단적인 사례이다. 올해 195개인 골프장은 내년 400개로 늘어날 전망이다.
상하이사회과학원 셰캉(謝康) 교수는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0달러이지만 상위 5,000만명은 국민소득이 2만달러가 넘는다"고 설명했다. 또 1만달러 이상은 대략 2억명 정도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국과 같은 소비시장이 최소한 4개는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저렴한 물가와 통계에 잡히지 않는 지하경제까지 감안하면 같은 소득이라 해도 구매력은 한국인의 3배 이상이라는 게 정설이다.
세계적 기업들이 앞다퉈 중국내 첨단 제품 생산라인을 증설하고, 연구개발(R&D) 센터를 설립하는 것도 '중국에서 만들어 세계로 수출하기 위한 전략'보다는 중국인들을 사로잡는 제품을 내놓기 위한 것이다.
일본 최대 전자업체 소니는 지난해말 전략회의에서 중국을 미국에 이어 제2의 판매시장으로 육성하겠다며, 신제품·신기술 최우선 발표지역에 중국을 포함시켰다. 지난해 소니는 초박막액정화면(TFT-LCD) TV, 디지털 캠코더, 화상회의시스템 등 10여종의 현지 생산라인과 R& D센터를 저장성 우시(無錫)에 설립하기도 했다.
또 지난해 상반기 순이익중 80%를 중국에서 올린 폴크스바겐이나, 최근 최고급 차종인 '렉서스' 직영판매를 실시한 도요타자동차 등도 중국내 생산능력을 향후 5년내 5∼7배로 늘린다는 구상이다. 미국 등 선진국과 중국 등과의 첨단제품 출시 시차는 이미 사라졌고, 모델은 더 다양해지고 있다.
LG전자 중국법인 정대영(鄭大泳) 부장은 "같은 TV공장이라도 생산라인 수는 한국의 4∼5배나 될 만큼 생산기종이 다양하다"며 "신발과 팬티만 팔아도 13억개라던 시대는 끝난 지 한참됐다"고 말했다.
/베이징·상하이=유병률기자 bryu@hk.co.kr
■ 中의 30,40대 신흥부유층
중국의 경제성장은 중국인들의 소비행태나 사고방식도 바꾸고 있다. 특히 30∼40대 신흥부유층은 절제와 검소로 다져진 중국 전통적인 부유층과 달리, 철저히 서구 지향적 삶을 누리고 있다.
상하이 근교 90여평 고층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부 왕찡(王靜·39)씨. 해외 유학파인 남편은 자동차 수입회사의 고위 임원으로, 월평균 수입이 6만위안(900만원). 그녀는 일주일에 서너번씩 2,000위안(30만원)짜리 피부관리를 받고, 일주일에 4∼5번은 외식을 한다. 한달에 2만위안(300만원)정도인 용돈은 대부분 자기관리와 사교활동에 들어간다. 하나뿐인 아들은 캐나다계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다.
제일기획은 지난해 중국의 신흥부유층 18가구를 선정, 한달여 밀착 취재한 결과 이들이 전형적인 '보보스(부르주아의 물질적 풍요와 보헤미안의 자유스러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선정대상은 정보기술(IT)·서비스·금융업에 종사하면서 월수입이 최소 3만위안(450만원)인 베이징과 상하이의 30∼40대. 이정도 수입이면 중국내에서 상위 3%에 속한다.
이들은 75∼90평의 고층아파츠나 고급빌라에 살면서, 2대 이상의 외제승용차를 가지고 있었다. 자동차는 자신이 상류층임을 드러내는 가장 큰 요소라는 판단 때문이다. 가족 모두에게 골프는 필수이고, 일주일에 2∼3번은 꼬박꼬박 사교 클럽에 참석하고 있었다.
명품 브랜드 중에서는 베르사체(옷), 페라가모(신발과 핸드백), SK?(화장품), 오메가(시계), 벤츠(자동차) 등을 선호하고, 정기 세일기간을 이용해 홍콩으로 건너가 쇼핑을 한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면 최고의 투자도 아끼지 않는데, 신분의 상징이 돼버린 국제학교에 입학시킨 뒤 해외유학을 보내는 게 정해진 코스이다. 자녀들이 미국에 정착해 전문직을 가지는 게 최고 바람이다.
이들을 취재했던 제일기획 오해원 차장은 "이들은 젊고 유능하며, 전통적인 중국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신인류"라며 "현재의 즐거움과 가족의 행복이 이들에게는 최대 목표였다"고 말했다. 이는 중국 젊은층이 갈구하는, 미래 중국의 모습이기도 하다.
/유병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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