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 도버해협을 건너 파리를 찾은 적이 있다. 프랑스 칼레의 부두에 내려 어느 한국인이 경영하는 낡고 초라한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이튿날 아침 지하철을 타고 파리의 중심가인 샹젤리제로 향했다. 지하철역에 내려 땅 위로 올라 왔을 때 내 눈앞에 전개된 파리의 풍경은 마치 밀턴의 '실락원'에서 사탄이 지옥에서 빠져 나와 에덴동산을 보았을 때의 그것만큼이나 아름다웠다.다른 것이 있었다면 '실락원'에서 묘사된 에덴은 신이 만든 것이고, 파리는 인간이 만든 도시라는 것뿐. 고색 창연한 18세기의 잿빛 건물 앞 테라스에 놓여 있는 수많은 의자들, 그 옆에 무리 지워 피어 있는 화사한 빛깔의 꽃을 담은 화분들, 그리고 여기 저기 세워져 있는 우아한 색채의 파라솔 모양의 차양들은 주위 환경과 탁월한 조화를 이루어 파리 특유의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었다.
나는 이방인의 낯설음도 없이 산책하듯 이곳 저곳을 거닐며 프랑스인들이 아름다운 파리를 만들기 위해 센 강의 물빛까지 이용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보내고 정성을 쏟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프랑스인들이 그곳에 세워져 있는 노틀담 사원 하나를 짓기 위해 3대에 걸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알고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서울은 어떠한가. 오늘날 서울은 민족 정서와 한국의 미를 나타내는 검은색 기와 지붕의 유현(幽玄)한 선은 찾아보기 힘들고 급하게 지어 올린 모양새 없는 건물들이 아름다운 산을 가리면서 여기 저기 숲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최고 건축미를 자랑하는 종묘는 희랍시대의 파르테논에 상응하는 성스러운 곳이지만 그 앞 비좁은 광장은 더러움으로 얼룩져 있다. 종로에는 하루가 멀게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지만, 그것은 다른 건물들과 함께 칙칙하고 조잡한 원색의 큰 글씨가 적힌 간판들로 덮여져 사람들의 시선을 몹시도 피곤하게 한다.
최근 서울시가 청계천을 복구하는 데 이어, 수천개의 간판을 정비하여 종로를 전통과 현대가 함께 숨쉬는 아름다운 거리로 만들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은 무척 환영할 만한 일이다. 우리가 동대문과 종묘, 그리고 종각으로 이어진 전통의 구도(構圖) 속에 무질서한 종로의 풍경을 선진국 수준으로 재정비해서 문화의 광장으로 만들겠다는 사업에 이렇게 갈채를 보내는 것은 이러한 노력이 유서 깊은 서울을 아름다운 국제도시로 만드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태 동 서강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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