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월13일 로렌스 더글러스 윌더가 미국 버지니아주 지사로 취임했다. 윌더는 미국 역사상 첫번째 흑인 주지사다. 미국 역사가들 가운데는 그를 첫번째 흑인 주지사로 꼽지 않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남부 여러 주들이 다시 합중국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피크니 핀치백(1837∼1920)이라는 흑인 사나이가 잠시 미시시피주 지사 노릇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미국 정치 과정을 통해 주지사로 뽑힌 뒤 임기를 마친 흑인은 윌더가 처음이다.윌더의 주지사 당선은 이중으로 특기할 만했다. 우선 윌더가 흑인이라는 점이 그랬지만, 버지니아가 남북 전쟁 당시 노예제의 존속을 옹호하던 남부 연합의 리더 격이었다는 점도 그랬다. 지금도 버지니아에는 내전 당시의 전적(戰蹟)이 많이 남아있다. 주지사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윌더는 남부 연합의 영광을 기리는 유적들 앞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 앞에서 "이 유물들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의 흔적일 뿐 지금 존재하는 것의 표상은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주지사로 당선될 때까지 윌더는 16년간 버지니아주 상원의원으로 일했다. 흑인으로서는 역시 처음이었다.
윌더는 1931년 1월17일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보험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형편이 아주 어렵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윌더 역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대개 그랬듯, 극심한 차별 속에서 자랐다. 화학 전공으로 버지니아유니온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는 청동성장(靑銅星章)을 받고 제대해 워싱턴의 하워드대학 로스쿨에 진학했다. 윌더는 그 뒤 변호사로서 흑인민권운동에 뛰어들었지만, 늘 비폭력 온건 노선을 옹호했다. 그의 정치 노선이 백인들을 불안하게 할 만큼 급진적이었다면, 그가 주지사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 종 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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