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의 피 튀기는 이야기라고 해서 '라스트 사무라이'(사진)에 남녀상열지사가 아예 없을 거라고 속단한다면 조금은 실망이다. 톰 크루즈가 맡은 역할은 알그렌 대위. 남북전쟁의 영웅이었으나 지금은 일본 신식군대의 교관이 되었다. 그의 곁에서 타카라는 여인이, 말이 통하진 않지만 헌신적인 도움을 준다. 전투에 나가는 알그렌에게 타카가 갑옷을 입혀주는 신은 이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 특히 알그렌 발 밑에 무릎을 꿇은 타카의 모습은, 일본의 '복종 문화'에 대한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읽을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성적 뉘앙스를 풍긴다. 이러한 감정선 때문인지 '라스트 사무라이'는 퍽퍽한 전쟁영화로만은 느껴지지 않는다.여기서 기모노라는 의상 자체가 풍기는 뭔가 야릇한 느낌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선 처참한 가위질을 통해 누더기가 되어 개봉되긴 했지만, '감각의 제국'의 강렬함은 '기모노 필링'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뭔가 꽁꽁 숨긴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개방형'으로 바뀌는 게이샤들의 기모노 컨셉. 만약 기모노를 입히지 않고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다면, 그건 이 영화를 두번 세번 죽이는 일이다.
일본 의상을 통칭하는 말이긴 하지만, '기모노'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폭이 넓은 허리띠를 두르고 소매가 길게 처진 일본 여성들의 옷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기모노는 일본 영화를 벗어날 때 더욱 에로틱하게 의미심장해진다. 일본영화 속의 기모노가 일반적인 생활 의상이라면 일본영화 밖에서 사용된 기모노는 뭔가 찌릿한 느낌을 주기 위해 의도된 특수 의상? '일본'이라는 국가명이 연상시키는 온갖 섹슈얼 이미지와 신비감은 기모노에 집약되는 셈이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미래도시 전광판에 등장해 미소 짓는 기모노 여인의 모습은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며, '킬 빌'에서 루시 리우가 기모노를 입고 펼치던 액션의 기묘한 느낌도 꽤나 독특하다. '라스트 사무라이'도 마찬가지. 타카가 폭포 밑에서 목욕을 마치고 나와 알그렌을 만나는 장면은 어떠한 노출이나 육체 접촉 없이도 '정중색(靜中色)'의 느낌을 주는데, 그 장면에서 그녀의 하얀 기모노는 무척 빛났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에서도 기모노의 치명적 매력을 만날 수 있을까? 이젠 15년 전 영화가 되어 버린 이황림 감독의 '애란'. 고인이 된 임성민과 재일교포 배우 김구미자가 주연한 이 영화는, 필자의 중간고사를 망쳐버렸고 내신등급을 하나 정도는 깎아먹은 영화이기도 했다. 때는 일제 강점기인 1942년 여름. 요시무라(박영규)는 천황에 반대하며 조선 땅에 은둔하는 조류학자이며 그의 아내 히데코는 향수병에 걸려 있다. 샤미센으로 연주하는 에릭 사티의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애란'은 유난히 목욕 신을 자주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섹스 신. 이때 히데코는 기모노의 뒷부분을 들추고 요시무라를 유혹하고, 후배위 정사가 시작된다. 하지만 옷을 벗지 않는 그들.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누드가 흥분의 원천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나에게 그 장면은 뭔가 깨달음을 주었다. 아, 기모노의 치명적 매력이여!
/김형석·월간 스크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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