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세에 갑자기 따스한 봄기운이 돈다. 북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시작된 화평 무드가 중동과 서남아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는 고질적 긴장지역으로 확산되는 듯한 추세다. 9·11 사태이후 살벌한 긴장과 전쟁이 지배하던 국제정치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언제 추위가 다시 닥칠지 모르지만, 늘 조바심하던 국제사회로서는 일단 반길 일이다.리비아는 지난 주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하고, 이스라엘과 화해할 뜻까지 밝혔다. 시리아도 미국과 이스라엘을 향해 유화 제스처를 취했다. 이란은 핵계획에 관한 미국과 유럽의 압력을 수용할 뜻을 밝혔다. 미국이 불량국가 낙인과 함께 선제공격을 위협하던 나라들의 변화는 이라크 전쟁으로 국제 정치 지형이 바뀐 것을 상징한다는 지적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화해도 극적이다. 핵 무장한 채 적대하는 가장 위험한 이웃인 두 나라는 지난 주 정상회담에서 획기적 양보조치에 합의했다.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등에서 테러공격을 중단하고, 인도는 분쟁지역으로 인정치 않던 자국령 카슈미르의 장래를 협상하는 데 동의했다.
북한도 변화의 기류에 동참하는 듯한 모습이다. 미국의 안전보장을 조건으로 모든 핵계획을 동결할 용의를 천명하고, 미국의 민간 핵시찰단을 받아들였다. 부시행정부가 민간시찰단의 의미를 평가절하하고 북한은 핵억제력 보유를 과시하는 대치구도는 겉보기에 여전하지만, 양쪽 모두 타협 쪽으로 다시 선회할 속내를 내비치는 것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평화가 국제질서의 대세로 정착할 것으로 보기는 이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으로 불량국가들을 교정하고 고질적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길을 열었다는 낙관론과 함께, 오만한 일방주의가 기세를 얻어 장차 더 큰 분란과 혼돈을 야기할 것이란 경고가 엇갈린다. 특히 최근의 평화 무드가 이라크의 수렁에서 헤매던 부시 행정부가 재선 기반을 다지기 위해 애써 조성하는 것이란 지적은 새겨들을 만하다. 부시대통령이 야심찬 새 우주탐험계획을 밝힌 것이 그렇듯이, 세계 평화와 미래를 이끄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로 유권자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선거전략이 작용한다는 얘기다.
리비아는 해묵은 미국 팬암여객기 폭파테러의 책임을 수용, 미국의 제재를 벗어날 길을 모색해왔다. 미국도 민간석유사업 합작 등을 은밀하게 진행했다. 이에 따라 이렇다 할 대량살상무기 능력이 없는 리비아가 난데없이 포기선언을 한 것은 언뜻 후세인 몰락에 놀라 생존을 도모하는 몸짓이지만, 부시 대외정책의 평판을 높여주는 대신 봉쇄해제를 얻는 타협의 소산일 수 있다는 풀이가 나온다.
문제는 정략적 평화 드라이브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다. 일방주의를 주도하는 네오콘, 신보수주의세력의 기수 리처드 펄 전 국방자문위원장은 최근 저서 '악의 종말'에서 이란 시리아 사우디 북한의 즉각적 정권 교체를 외쳤다. 특히 동맹의 이해를 돌보라는 지적과 관련, 미국과 일본의 이해는 한국의 그것과 다르다며 한국의 위험도 무릅쓸 것을 주장했다. 온건보수파와의 논쟁의 폭을 넓히기 위한 과격 주장이란 지적도 있지만, 선거 상황에 따라 평화 무드가 이내 사라질 것이 걱정된다.
온건파의 상징 파월 국무장관의 영향력 퇴조는 우려를 더하게 한다. 그는 최근 부시 정부에서 개인적 코드를 관철하려 했으나 '후퇴와 손실로 점철된 전투'를 거듭했다고 회고, 퇴진을 시사했다. 그의 사람인 프리처드 전 대북특사가 참여한 북핵 민간시찰단을 부시 행정부가 평가절하한 것도 그의 쇠퇴를 확인케 한다는 지적이다. 파월은 일방주의에 합리적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한 PR 맨에 불과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부시 재선으로 기세가 오르거나 반대로 재선이 위태로워지면, 네오콘은 거추장스런 위선적 허울마저 벗어 던지고 강경한 일방주의로 내달릴 수 있다.
강 병 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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