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5년 1월12일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가 64세로 작고했다. 미국의 수학자 벨은 '수학의 사람들'(1937)이라는 저서에서 페르마를 다룬 장의 제목을 '아마추어의 왕자'라고 단 바 있다. 실제로 페르마의 삶은 수학계 바깥에서 궤적을 그렸다. 그의 생업은 변호사였고, 툴루즈 지방의회가 그의 활동 무대였다. 수학은 그에게 일이 아니라 취미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그 취미 활동을 통해서, 아무리 소루한 수학사도 생략할 수 없는 걸출한 수학자가 되었다.페르마는 다섯 살 위인 데카르트와 완전히 독립적으로 해석기하학을 발명했다. 그는 또 스물두 살 아래인 파스칼과 나란히 확률론을 창시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수학적 업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미적분학의 발명일 터인데, 페르마는 뉴턴이 태어나기 13년 전에, 그리고 라이프니츠가 태어나기 17년 전에 극대값·극소값 문제를 비롯한 미분학의 중요한 개념들을 생각해내고 응용했다. 페르마는 근대적 정수론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페르마라는 이름을 수학사에서 결정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마지막 정리'일 것이다. 이 정리의 내용은 "n이 3 이상일 때 하나의 n제곱 수를 두 개의 n제곱 수의 합이 되도록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n이 2일 때는 그것이 수없이 가능하고, 우리는 이를 피타고라스 정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세제곱 이상의 제곱수들에 대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다. 페르마는 이 정리를 평소 지니고 다니던 책 귀퉁이에 적고는 이어 "나는 이 정리를 증명했지만, 여백이 너무 좁아 생략한다"고 덧붙여놓았다.
이 정리는 '페르마의 문제'라는 이름으로 그 뒤 수많은 수학자들을 괴롭혀오다가, 1994년에 와서야 영국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와 리처드 테일러에 의해 완전히 증명됐다.
고 종 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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