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선정 요리학원'의 하선정(81) 이사장은 한국 요리계의 '대모'(大母)로 통한다. 보릿고개를 걱정했던 50년 전, 서울 종로에 국내 최초의 요리학원인 '수도요리학원'을 설립한 그는 요리전문가를 키우는데 한평생을 헌신했다. 하 이사장의 요리에 대한 열정은 전문가 양성에 그치지 않는다.그는 중국, 일본은 물론 미국, 유럽에까지 한국 요리의 진미를 전하는 '한국 요리 전령사'였다. 하 이사장은 특히 유럽에서도 요리의 풍류를 아는 프랑스인들에게 한국 요리의 맛과 멋을 뽐내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그 배경에는 의외로 소설 '25시'의 저자 비르길 게오르규 신부가 있었다.
문학작품을 통해 인간의 가치와 자유의 소중함을 설파한 벽안의 신부(1992년 작고) 게오르규와 하 이사장이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1년. 평소 한국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게오르규 신부가 한국을 찾아 문인, 예술인 등 문화계 인사들과 만날 때 하 이사장은 요리계의 대표격으로 그 자리에 참석했다.
하 이사장은 게오르규 신부에게 한국의 음식은 '어머니의 정성'이며, 문화의 한 축이라고 소개했다. "제가 가톨릭 신자임을 밝히고 요리연구가가 안 됐더라면 문인이 됐을 것이라고 소개하자 게오르규 신부가 남다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그 후 게오르규 신부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하 이사장을 찾아 한국음식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 꽃을 나누며 가까운 친구가 됐다.
한불 수교 100주년이 되는 84년. 하 이사장은 주불 한국대사관 등으로부터 파리에서 한국 요리 전시회를 개최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몇 번이고 망설였습니다. 중국, 미국 등에서 우리 음식을 소개한 적은 있었습니다만 요리의 천국이요, 미식가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한국 요리를 선보인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요."
처음에는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계속된 부탁에 난감해진 하 이사장은 게오르규 신부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게오르규 신부가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단순히 음식만을 소개해 하는 게 아니다.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것이다. 게다가 한불 수교 100년이라는 의미가 크지 않은가'" 게오르규 신부는 주불 한국대사관보다 더 간곡히 요리 전시회 개최를 권유했던 것이다.
"한국인은 개를 잡아먹는 야만인으로 알고 있는 프랑스인들에게 진짜 한국 음식, 한국 문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지요."
게오르규 신부의 끈질긴 설득 끝에 300여명이나 되는 '음식 사절단'을 이끌고 파리로 향한 하 이사장의 다짐은 그대로 실현됐다. '한국 전통요리의 밤'이 열린 파리 한 복판의 'PARIS PLM' 호텔은 프랑스의 지도층 인사 300여명이 참석해 말 그대로 북새통을 이뤘다. 생활 요리, 궁중요리, 민속요리뿐 아니라 국악공연에 이어 전통혼례를 치른 다음 폐백상을 선보이자 테이블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행사가 끝날 무렵 게오르규 신부는 무대에 올라 "꼬레아 사람들은 부모를 잘 섬기며,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아끼는 민족이요,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민족"이라며 한국을 치켜 세웠다.
이듬해 게오르규 신부가 한국을 다시 찾았을 때 하 이사장은 게오르규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한국 음식을 대접하며 파리에서의 한국 요리전시회에 대한 이야기 꽃을 나눴다. 그 후 게오르규 신부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두 사람은 만나면서 우정을 쌓아갔다. 하 이사장은 "게오르규 신부를 만날 때마다 한국의 신부님과 같은 친근감이 들었다. 20년 전 그의 권유가 없었다면 프랑스에 한국 요리의 진수를 알리는 기회를 영영 놓쳤을 것"이라며 10여년 전 작고한 게오르규 신부와의 인연을 회고했다.
/송두영기자 dy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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