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월 3일자에 실린 '찜찜한 삼국지 열풍'이라는 기사 내용이 재미있다. 가장 잘 나가는 삼국지의 경우, 88년에 선보인 이후 1,500만 부 가까이 나갔다고 한다. 출판사측에서 "미안할 정도로 잘 팔린다"고 말하는 게 실감이 난다.왜 그렇게 잘 팔리는 걸까? 삼국지 자체의 뛰어난 재미와 평역본을 낸 작가들의 탁월한 역량을 빼놓을 순 없겠지만, 아무래도 삼국지를 읽는 것이 '논술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속설 탓이 제일 큰 것 같다. 그래서 초등학교 6학년생들까지 삼국지 읽기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속설의 확산엔 '출판사의 과도한 선전과 잘못된 이해'가 적잖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만으론 의문이 다 풀리지 않는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한국인들의 자녀 교육관이다. 이는 주변에서 삼국지를 권하는 사람들의 주된 논거를 뜯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치열한 생존경쟁 체제하에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한국의 부모들은 세상이 살벌하며 권모술수가 흘러 넘치는 곳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대학입시 경쟁을 '전쟁'의 수준으로 격화 시키는 데에 부모들이 앞장서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치를 귀신같이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순진무구하고 이타적인 품성을 갖고 있는 자식? 자식을 그렇게 키우고 싶은 부모가 얼마나 될까? 공적 담론을 통해선 사랑의 순수성을 역설하던 지식인도 막상 자기 자식의 혼사에 대해선 웬만한 '마담 뚜' 못지않은 현실적 안목을 갖게 된다는 건 전혀 비밀이 아니지 않은가.
"세상 알 건 알아야지요." 자식에게 삼국지를 읽히는 부모들 가운데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많다. 삼국지를 읽으면 무얼 알 수 있다는 건가? 무엇보다도 삶은 전쟁이요, 처세술과 임기응변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무기라는 걸 알 수 있을 게다. 물론 그 무기를 다루는 법도 배우게 될 것이다.
그걸 배우는 게 나쁜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초등학생 때부터 배워야 할 것은 아니며, 불타는 향학열로 범국민적인 '열풍'까지 불러 일으켜야 할 학습 대상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삼국지 평역본을 낸 작가들의 선의는 존중해야 하겠지만, 그 작가들 역시 지금과 같은 열풍에 대해선 다소 곤혹스러워 할 것이다.
"삼국지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다." 삼국지를 쓴 어느 작가는 그렇게 말했다지만, 그건 나라 차원의 이야기일 것이고 개인 차원에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삼국지를 읽어야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삼국지 열풍은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가 아니다. 그건 한국적 삶의 진실의 한 단면을 웅변해주는 것이다. '한국형 발전 모델'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면 그 모델의 첫번째 특성은 '투쟁 지향성'이다. 초고속 성장과 '빨리빨리 문화'는 바로 그런 투쟁 지향성의 산물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투쟁 지향적 발전 패러다임은 전체적인 국부의 증대엔 큰 기여를 해 왔지만, 더 이상 삶의 질은 높이지 못한다. 삶 자체가 격렬한 투쟁의 연속인 바, '무엇을 위한 삶인가'라는 의문에 봉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치판의 마키아벨리즘은 비난하면서 자녀들에겐 마키아벨리즘의 지혜를 가르쳐야만 하는 이중성이 한국적 삶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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