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지음 문학동네 발행·8,000원
"만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나는 M에게서 완전히 놓여나든지 아니면 M을 완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러나 작가는 언어로 발언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 글을 쓰는 배수아(39)씨는 작가다. 언어를 쓰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몰라 자유로울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다 알아 부유할 수도 없다는 것. 이 숙명을 깨달았을 때 배수아씨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배씨의 글쓰기는 절망과 멀리 있는 '콤플렉스 없는 세대' 가운데서도 누구보다 앞서 나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글이란 그 형태로나 내용으로나 이미 규정되어 있는 어느 폐쇄된 영역 안에 머무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쓰는 언어에 갇히는 대신, 배수아씨는 언어를 자유롭게 풀어주기로 했다. 그것은 언어를 도구로 삼는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장편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언어를 해방시키려는 작가의 실험이다.
그러니 소설이 정교한 줄거리를 갖지 않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독일에 체류하는 화자는 독일어를 가르쳐준 M과 연인이었다가 헤어졌으며,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산책을 하고, 연말에는 친구 요아힘과 함께 파티에 참석한다.
화자가 들려주는 얘기는 일상에 대한 진술과 과거에 대한 회상이 섞여 있다. 독일어 교사 M과의 추억이 작품에서 중요한 줄기로 자리하되 그것은 사랑을 나누었을 때의 환희와 달콤함, 이별한 뒤의 상처와 눈물 같은 감정의 묘사가 아니다.
작가는 그 자리에 언어에 대한 사유를 적어 놓았다. '언어를 알게 된다는 것은 결국은 자국어의 경계를 넘어서서 사고하는 일이며, 성장한다는 것은 단지 언어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며 그것은 단지 언어만이 사고의 명확한 도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M의 생각은 환영이었다. M은 자국어가 단지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넘어설 수 있는 경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설사 외국어에 능통하다 하더라도 역시 의식의 감옥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으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내가 M과 서로 다른 자국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졌다.'
그래서 소설 제목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상징적이다. 자신의 언어관을 밝히기 위한 글쓰기로 어쩌면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더 잘 어울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이야기의 구조물로서의 소설의 도움을 받았다.
꼭 들어맞는 언어를 하나하나 찾아 헤매면서 소설을 만드는 게 아니라, 언어가 그 안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도록 하기 위한 소설을 만들고 싶어한 작가의 소망이 읽혀진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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