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월10일 로마 교황청이 로마시 북서부 교황령을 바티칸 시국으로 개명했다. 바티칸 시국은 그 다음달 11일 로마 라테라노 궁전에서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사이에 체결된 라테라노 협정에 따라 공인됐다. 이로써 1870년 통일 이탈리아가 로마와 그 둘레의 교황령을 점령하면서 불거진 '로마 문제'가 해결되었다. 1861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를 국왕으로 해 탄생한 이탈리아 왕국은 처음에 토리노를 수도로 삼았고 이내 피렌체로 천도했다가, 로마 점령 이후 이 3천년 역사의 고도로 중앙 정부를 다시 옮긴 바 있다. 그 뒤 이탈리아 국가와 가톨릭 교회 사이에 생긴 갈등을 '로마 문제'라고 부른다.무솔리니 정부와 맺은 라테라노 협정에 따라 바티칸은, 중세 이래의 널따란 교황령에 견주면 그 규모가 보잘 것 없긴 했으나, 교황을 주권자로 한 독립적 군주국이 되었다. 또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빼앗긴 교황령에 대해 일정한 보상을 받았다. 교황령은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이 미치는 가톨릭 교회의 영유지를 가리키는데, 8세기에 프랑크 왕 피핀이 롬바르디아 왕에게서 빼앗은 땅을 교황 스테파누스2세에게 기증한 데서 비롯됐다. 라테라노 협정은 또 가톨릭교가 이탈리아의 유일한 국교임을 확인했고, 초등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중등학교에서도 의무적으로 종교 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다.
무솔리니도 이 양보의 대가로 교황의 정치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파시즘과 가톨릭교회 사이의 이 연대는 긴장 속의 연대였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공통의 적을 지니고 있었고 농촌적 삶에 대한 믿음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파시즘과 교회는 통하는 바가 있었지만, 무솔리니는 근본적으로 이교도적 퍼스낼리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상화한 로마는 교황의 로마가 아니라 기독교 시대 이전 고대의 로마, 곧 황제들의 로마였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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