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 토인비 지음·이창신 옮김 개마고원 발행·1만5,000원
2002년 영국 런던의 대표적 빈민가인 클래펌파크 단지, 아주 허름한 공공 아파트에 50대 초반의 여성이 혼자 입주한다. 계단에는 수십 년 동안 썩은 쓰레기 냄새와 그보다 더한 소변 냄새가 진동하고 실내에는 생활가재도구는 물론 난방시설도 없다. 문만 열면 가난에 찌든 이웃과 불량배들이 오가고 마약중독자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신분을 숨기고 잠입한 이 여성은 영국의 진보적 신문 '가디언'의 이름난 여성 칼럼니스트이자 방송인인 폴리 토인비. 빈곤의 악순환에 갇혀 희망을 빼앗긴 채 살고 있는 영국 절대빈곤층의 실상과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파헤치기 위해 '위장 전입'한 것이다.
30여년 전인 1970년 초년기자 시절에도 비슷한 체험으로 '노동하는 삶'이라는 책을 낸 그가 그간의 변화상을 현장에서 확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는 이때부터 몇 달간 자신의 모든 수입을 차단하고 빌딩 청소원, 병원 잡역부와 간병인, 빵공장 노동자 생활을 전전하면서 밑바닥 삶의 눈높이로 살아간다.
여러 세대 전부터 탄탄한 중산층 집안에서 자라 고소득자로 살다 의도적으로 하루 아침에 하층민으로 전락한 그에게 모든 것은 낯설 수밖에 없다. 본래 살던 곳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불과하지만 마치 외국으로 이민 간 사람처럼 허둥대고 실수를 연발한다. 먼저 정착 자금을 타기 위해 정부보조금 지급소를 찾아갔다. 온갖 욕지거리가 난무하는 그곳에서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고 겨우 400파운드(당시 환율로 한화 약 70만원)를 대출받았다. 저자는 그때 상담자에게서 받은 인상은 도움을 주는 공무원이 아니라 고리대금업자 같았다고 한다.
첫번째 직업은 용역회사를 통해 얻은 병원 잡무였다. 환자 이송 등을 맡으며 발이 부르트도록 일한 대가는 시간당 4.35파운드(약 8,000원)이었다. 대출금으로는 TV와 침대 등 가재도구를 장만했다. 수도, 가스·전기, TV시청 등을 포함해서 일주일 동안 나가는 고정지출 비용은 모두 43.50 파운드(약 8만원). 아파트 임차료 59파운드(약 11만원)와 이것 저것을 제외하다 보니 순식간에 70파운드의 빚을 졌다. 일주일을 4파운드로 살아야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30년 전 병실보조원으로 일하던 때보다 실질임금이 줄었다는 것이다. 당시 임금은 일주일에 12.50파운드로 물가와 임금상승 수준을 고려할 때 210파운드에 해당한다. 현재 받고 있는 174파운드보다 훨씬 높은 액수이다.
그의 위장전입은 결국 탄로났다. 외무장관의 관저 청소를 지원했던 것이 실수였다. 당시 잭 스트로 장관이 사용하는 이 건물은 그가 인터뷰를 위해 여러 차례 찾아왔던 곳이었다. 그가 남의 국민보험번호를 사용하고 있는 사실을 정보기관이 알아낸 것이다. 이 일로 신문사 편집국장이 소환되고 경고를 받았다.
'거세된 희망'(원제 'Hard Work')은 서너달 동안 겪은 그의 이런 저런 체험과 에피소드를 하나하나 들려주는 탐사보도 기록이다. 그는 곳곳에서 정부의 복지정책과 고용, 실업 대책 등이 얼마나 허점 투성이인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실직자에서 노동자로 바뀌는 순간부터 다시 심각한 빚더미 속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일자리만을 늘려야 한다고 썼던 자신의 기사가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한다. 언론이 빈곤 문제를 떠들어대지만 마약중독자, 건달, 통제불능인 가정의 모습만 부각함으로써 빈곤을 단지 심리적·범죄적 현상으로 인식하게 하고, 정치적인 문제의 원인을 개인적인 게으름과 무능 탓으로 돌리기까지 했다고 꼬집었다.
저자는 부자와 빈민이 공존하는 도시에서 두 계층은 각기 다른 평행선 위에서 서로를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진 자의 안도감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빈민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려는 것일까, 그는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안도감이 밀려왔다고 털어놓았다. "내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이해하게 되어 기쁘기도 했지만, 저곳이 아닌 이곳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기자로서 특정한 목적과 방향을 갖고 접근했지만 빈곤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단발성 르포가 아니라 현장에 뛰어들어 몇 달씩 살고 이를 책으로 펴냈다는 점에서 저자의 노력은 놀랍다.
영국은 구미 선진국 중에서도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다. 빈곤층이 전체 인구의 20%에 이른다. '노동을 위한 복지'라는 구호 아래 복지국가의 틀을 다진 나라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30개 국 가운데 멕시코, 미국에 이어 부의 왜곡이 극심하고 불평등한 나라로 꼽히는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 조사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최저생계비 미만의 절대 빈곤층이 2배로 증가했고, 무직자 가구가 20%에 이른다. 영국보다 훨씬 심각하다. "신빈곤 문제를 추적하기 위해 책을 기획했다"는 출판사 관계자는 조만간 한국 빈곤층의 실태를 추적해볼 계획이라고 한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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