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인터넷 홈페이지는 우리 국회의 역사를 '국회가 걸어온 길'이란 이름으로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노라면 해방 이후 국회의 역사가 독재정권에 맞선 투쟁사로 점철돼 왔음을 느끼게 한다. 2대 국회 때의 부산정치 파동에서 9대 국회의 반유신투쟁, 10대 국회에서의 김영삼 총재 제명에 맞선 야당의 투쟁 등등. 이 대목에선 예외 없이 본회의장 점거, 의장석 점거, 필리버스터 등 야당 의원들의 물리적 저항의 장면이 등장한다. 국회는 독재정권에 맞서 최후의 저항수단으로 그것을 사용해왔고, 국회사도 이 장면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다.한·칠레 FTA비준동의안 처리가 예정됐던 8일에도 단상 점거와 의사방해 장면이 연출됐다. 농촌에 지역구를 둔 이른바 '농촌당' 의원들에 의해서였다. 박관용 의장의 찬반토론 개시 선언을 신호로, 이들은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움직이면서 물리적 저지에 나섰다. 곧 정계를 은퇴할 늙은 의장이 "국회법을 지키면서 절차에 따라 당당하게 하자"고 요구했지만 단상을 점거한 40여명의 의원은 귓등으로 흘리며 선배들의 '자랑스런 역사'를 꿋꿋이 계승했다.
그러나 21세기 국회의 투쟁은 국회사가 소개하는 과거의 투쟁과는 외형만 닮았을 뿐이다. 적어도 선배 의원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웠고 누구나 인정했던 투쟁의 명분과 정신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려웠다. 대신 곧 있을 총선에서의 표 계산만이 단상을 점거한 그들을 움직였을 따름이다. 집단이기주의의 볼모가 돼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막 가겠다는 이들의 저지투쟁을, 아직 공란으로 남은 16대 국회사가 장차 어떻게 기록할지 꽤나 궁금하다.
이동훈 정치부 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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