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섞을 게 더 남아 있나요?" 잡종 혹은 혼성교배라는 뜻의 하이브리드(hybrid), 즉 '이종(異種) 문화간의 결합'은 날로 가속화하고 있다. 이 현상은 창작의 의미까지 바꾸었다. 문화 생산자에게 이제 최고의 능력은 창조성이 아니다. 대중이 좋아할 만한 다양한 재료를 모아 전혀 새로운 작품인 듯, 이물감 없이 탄탄하게 섞어내는 '손맛'이 최고의 재주로 통하고 있다.재미는 장르에 선행한다
하이브리드 시대에 장르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장르보다 중요한 것은 재미.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는 문화의 명품을 가리는 절대 명제다. 정통을 고집하는 것은 무모하다. '무인시대'나 '왕의 여자' 같은 정통 사극보다는 사극이면서 연애심리극인 영화 '스캔들', 코미디와 대작 전쟁영화를 한데 버무린 '황산벌'이 인기다. 드라마 '다모'도 사극에 무협을 더했고, '대장금'도 판타지 성격이 다분하다. 연극, 클래식 등 고급문화로 분류되던 장르의 견고한 성도 무너지고 있다.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클래식 스타로 떠올랐고, 국악에서도 '푸리' '공명' 등 타악그룹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대중음악에서도 정통 장르에 힙합을 섞은 하이브리드록이나 애시드 재즈가 인기다.
영화 '매트릭스'와 '반지의 제왕'은 하이브리드의 좋은 예. 매트릭스는 SF와 일본 애니메이션, 홍콩영화, 기독교 신화 등 다국적 문화의 교배를 통해 탄생했다. 독창성이 없음에도 그 견고한 짜깁기는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반지의 제왕'은 B급 공포영화를 찍던 감독이 원작 신화를 바탕으로 블록버스터 적인 구성과 공포물 성격을 가미했다.
비주류·주류, 고급·저급 구분 사라져
하이브리드 시대에 주류·비주류, 고급·저급 문화의 구분은 없다.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 루시드폴 등 언더그라운드에서 성장한 이들이 대중가수 이소라의 음반에, 언더 힙합 뮤지션 4WD가 거미의 앨범 작업에 참여하는 식이다. 고급 취향으로 분류되는 윤상이 지극히 대중적인 보아의 노래를 작곡하고, 중견 작곡가 이영훈이 걸그룹 쥬얼리에게 곡을 주기도 한다.
흔히 B급으로 분류되던 쿵푸 영화, 사무라이 영화, 이탈리아 서부극 등도 주류 영화의 재료로 대거 등장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이나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등도 B급 스플래터(피가 낭자한 호러 영화) 영화의 특성을 담고 있다. 서커스, 마술, 차력 등 하위문화로 취급받던 장르도 주류문화와 섞여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다. 무용극 '무무'는 시골 장터의 오락거리로 치부되던 차력을 한국 전통 무용과 결합했고, 연극 '차력사와 아코디언'에서도 배우가 무대 위에서 차력 시범을 보인다. 조만간 선보일 영화 '아라한 장풍대작전'도 무술의 달인을 소재로 하고 있다.
매체간의 융합 시대
장르간의 융합을 넘어서 이제는 매체와 매체의 결합으로 이어지고 있다. 흔히 말하는 '원 소스 멀티 유즈' 방식. 멀티 태스킹에 강한 신세대는 여러 가지 욕구를 동시에 충족하기를 원한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준비 중인 '드라이버3'는 광고와 영화, 게임을 결합했다. BMW 자동차 홍보용으로 제작하는 이 영화는 자동차광 중 영화와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겨냥했다. 영화와 게임을 결합해 즐길 수 있는 하이브리드 DVD도 선보이고 있다. 최근 출시된 '팬텀 오브 인페르노'는 영화를 보면서 리모콘을 조작해 게임을 즐길 수 있다.
탈근대 시대의 대세
분화를 통해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이 근대주의의 특성이었다면, 영역을 가리지 않고 뒤섞어내는 하이브리드는 탈근대의 성향이다. 이런 잡종화의 원동력은 '정보 홍수'. 문화평론가 강명석씨는 "일반인은 상업적이고 익숙한 몇몇 장르 외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대중이 수많은 고급 정보를 접하게 되면서 장르나 영역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결합의 대상이 되지 않는 장르가 있다면 그것은 재미가 없기 때문일 뿐"이라고 말한다.
장르와 장르의 혼성교배로 문화의 고유성, 혹은 진정성이 사라진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제 진정성이란 문화를 전유했던 일부 특권층의 편가르기에 다름아닌 시대가 됐다. 엘리트 계층이 운동장 오페라나 유명 성악가의 축구장 공연을 비난하는 것은 문화 향유의 특권을 상실한 데 대한 안타까움으로 해석된다. 하이브리드 시대 문화의 진정성이란 결국 혼성교배를 통해 탄생하는 재미일 따름이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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