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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33> 나의 러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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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33> 나의 러브신

입력
2004.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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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젊을 때부터 노역이나 엄마 역을 맡아서일까? 내 연극에는 이상하게도 사랑이 빠져있었다. 연극배우 박정자는 그 흔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나는 그 고정관념이 미치도록 미웠다. 늘 '사랑이 없는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내게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사랑이 나타났을 때 그것은 걷잡을 수 없었고 그걸 제어할 수도 없었다'는 영화 '데미지'의 마지막 대사 한 구절에 자지러지는 나 아닌가. 사랑을 상징하는 하트 모양이 그러하듯 그건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지만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도 하니까.내가 처음 사랑 이야기를 다룬 연극에서 주인공을 했던 건 결혼하기 전 1970년 명동 예술극장에서 공연했던 '슬픈 카페의 노래'에서였다. 제목처럼 예측할 수 없는 기형적 사랑을 그린 연극이었다. 마을 건달은 동네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노처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동네 아가씨들 중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꼽추에게로 향해 있다. 큐피트의 화살은 늘 명중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가! 꼽추는 건달을 사랑한다. 엇갈린 사랑의 행로를 연기하며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아, 이게 사랑인가?"

그 후 내 연극에서는 사랑을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연출가들은 나는 늘 강렬하고 개성 넘치는 역을 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93년 무대에 올린 '내 사랑 히로시마'에서 나는 처음으로 제작을 맡았다. 가슴 떨리는 사랑 이야기를 놓칠 수 없었으니까. '내 사랑 히로시마'를 처음 본 건 60년대 프랑스 문화원에서였다. 영화로 만들어진 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언젠간 내가 무대에서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86년 프랑스 극단이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연극으로 만든 '내 사랑 히로시마'를 공연했을 때 이런 내 소망은 더욱 간절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이 섰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첩첩산중이었다. '내 사랑 히로시마'는 영화 시나리오로만 국내에 번역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프랑스문화원에 근무하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초벌 번역을 한 뒤 'GQ'의 편집장인 이충걸에게 번안 작업을 맡겼다. 그는 희곡을 써본 적은 없지만, 뒤라스가 연금술처럼 펼쳐낸, 달콤쌉쌀한 사랑의 촉각을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연출은 채윤일에게 맡겼다. 그리고 윤소정을 나와 함께 더블로 여주인공 역에 캐스팅했다. 그 역할을 그토록 탐내왔지만 나 혼자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마침내 공연의 막이 올랐을 때 나는 일을 저질렀다. '내 사랑 히로시마'는 남녀가 벌거벗고 뒤엉킨 채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과 사랑을 나눈 기억이 있는 프랑스 여배우가 평화를 주제로 한 영화를 찍기 위해 히로시마에 왔다가 일본 남자와 벌이는 사흘 간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니 그럴 수밖에. 이 장면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전라의 뒷모습을 관객들에게 노출했다.

비록 뒷모습이지만 누드로 무대에 선다는 건 파격이었다. 그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두 사람의 사랑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11월의 왈츠'에 도전했다. 스무 살 연하의 청년과 사랑에 빠진 중년 여자의 독백으로 이뤄진 이 작품이 공연됐을 때 압구정동 실험극장은 말 그대로 미어터졌다. '150회 만원사례'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남긴 '11월의 왈츠'를 위해 내가 쏟아부은 노력은 처절했다. 주인공이 입는 빨간 원색의 원피스를 입으면 내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관객 앞에서 최대한 섹시하게 보이기 위해서 음식을 가려먹고 난생 처음 올인원 입어가며 공을 들였다. 하지만 오히려 얼굴은 반짝반짝 윤이 났다. '사랑을 하면 예뻐져요'라는 유행가 가사가 딱 들어맞았던 거다. 사랑은 그렇게 내게 열병이었다가 축복이었다가 때론 곧 폭발하고야 말 것 같은, 끓어오르는 정염이기도 했다. 내가 나이 80까지 아니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할 줄 아는 배우, 사랑을 연기하는 연극배우로 살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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