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齊) 나라 장공(莊公)이 사냥을 가다가 이상한 벌레 한 마리가 앞다리 두개를 쳐들고 수레를 막아서는 것을 보고 물었다. "이놈이 무슨 벌레이기에 이렇게 당돌한가?" "예, 사마귀란 곤충인데 앞으로 나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은 모릅니다. 제 힘은 요량도 못하고 대드는 묘한 놈입니다." 신하의 대답을 들은 장공은 "이놈이 군사였다면 천하의 용사가 되었을텐데…"하면서 뒤로 수레를 물려 피해갔다.며칠 전 보도된 북한의 공동사설을 읽다가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당랑거철(螳螂拒轍) 우화가 떠올랐다. 매년 정초 당보·군보·청년보에 같이 실리는 공동사설이란 것은 그 해 북한이 지향하는 정책방향을 가늠케 하는 김정일의 신년사다. 제목부터 '강성대국 건설' '혁명적 공세' 같은 전투적인 어휘로 점철된 사설은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입장은 일관하다"고 하면서도, 미국이 위협적으로 나오면 초강경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섬뜩한 적의를 드러냈다.
'총적인 투쟁과업'으로 정한 3대전선 가운데는 주민 사상사업 강화, 충성심 고취, 사회주의 위해요소 척결이 들어있다. 사회주의 혁명의 미몽에 취해 있으면서도 왕조시대의 충성심을 강조하다니 실소를 참기 어렵다. 세상 모든 나라가 대문 활짝 열고 공동의 표준(글로벌 스탠다드)을 찾기에 분주한 시대에, 혼자 앵돌아져서 딴 세상을 살고 있으니 정말 보기 딱하다.
올해는 좀 달라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던 터여서 이번 공동사설에 대한 실망이 더 크다. 경제개선 조치를 통해 시장경제 체제를 일부 도입하기 시작한 김정일이 얼마 전 남쪽 자본가들을 홀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보도가 있었다. 무언가 변화가 있으리라는 예측이 따랐다. 채산성을 살리지 못하는 기업소와 기관은 합쳐서라도 채산성을 높여야 한다면서 "남쪽 기업인들을 너무 속이고 홀대해 장사가 안 되는 것"이라 했다는 김정일의 교시가 그런 기대를 부풀렸던 것인데, 역시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다.
북한은 세상의 변화를 똑바로 읽어야 한다. 미국이 악의 축으로 규정한 독재자들 가운데 변하지 않은 사람은 김정일뿐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적인 종말은 말할 나위도 없고, 그토록 강고하던 이란과 리비아도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카다피가 자존심이 없어서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겠는가. 이란은 무엇이 무서워서 핵확산금지조약(NPT) 부속의정서에 서명하고 유엔 핵사찰단 입국을 허용하고 말았는가. 자신과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민생고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이 그것뿐임을 왜 모르는가. 여럿이 어울려 사는 마을에서 혼자 외톨이가 되어 따돌림 받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왜 모르는가.
얼마 전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과 점심을 먹다가 들은 말이 귓전을 맴돈다. 굶주림에 지친 어른들은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이지만, 아이들은 애초에 혼이란 게 없이 태어난 사람처럼 보이더라는 얘기였다. 개성공단 땅을 둘러보고 시가지 구경을 하고 온 동료는 할 일 없이 처마 밑에 앉아 해바라기 하는 주민들의 퀭한 표정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고 말했다.
2004년은 김정일 정권의 존망이 걸린 해가 되리라고 내다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외교안보연구원은 최근 근본적인 개혁정책과 대규모 외부지원이 없는 한 북한 체제의 경착륙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회생불능의 경제난, 꽉 막혀버린 외화조달 창구, 끊겨버린 식량과 에너지 지원…. 어디서 희망을 찾을 건가.
시간이 없다. 너무 늦었다. 북한은 미국의 선거와 한국 대통령의 곤경 등을 이용해 시간을 벌고, 줄타기 묘기를 통해 실리를 찾는 벼랑 끝 외교의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 미국은 두 번 속지 않는다. 제 나라 장공은 당랑을 기특히 여겨 피해 갔지만, 부시의 수레는 깔고 넘어갈 것이다. 지금 당장 불장난을 멈추지 않으면 파멸뿐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문 창 재 논설위원실장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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