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차를 타고 남서쪽으로 30여분을 달리면 타투아페 공단지역이 눈에 들어온다. 이 곳에는 브라질 제2의 민영은행 이투아가 설립한 전자회사 이투아텍 사업장이 자리잡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지난달 18일, 1층부터 3층까지 자동화 시스템으로 연결된 생산라인은 쉴새 없이 돌아가며 포장까지 완벽하게 된 데스크톱 PC와 노트북 PC 등을 토해내고 있었다.브라질의 PC 보급율은 13% 수준. PC·모바일 사업부의 네베스 페르난도 부장은 "올들어 사무자동화를 실시하는 기업이 많아 PC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라인을 거의 풀가동하고 있다"고 했다. 브라질 PC 시장의 70% 이상을 불법 조립 PC가 차지하고 있어 이 회사의 시장 점유율은 아직 3%에 불과하지만, PC 판매의 호조를 발판으로 최근 대형 평판 TV 등 영상가전 분야로도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1999년 금융위기 이후 내내 침체의 수렁 속에서 빠져 있던 브라질 내수 시장이 최근 조금씩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다. 축구 열기와 카니발로 유명한 브라질에 정보기술(IT) 열풍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것이 그 신호. 상파울루 시내에서 의류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한 교포는 "90년대 중반 하루 1만달러의 매출을 올린 적도 있었다"며 "브라질 내수 시장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고 기대를 감추지 못했다.
브라질 내수 시장이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는 조짐은 LG전자 브라질법인이 입주해있는 마켓 플레이스 빌딩 1층의 전자상가를 둘러보면서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상가는 한국으로 치면 강남과 비슷한 상파울루 신시가지 추크리 자이단 거리에 있는데, 휴대폰, 개인휴대단말기(PDA) 등 첨단 정보기기를 파는 상점마다 젊은이들의 발길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브라질 최대 전자유통점 패스트의 점장 카를로스 코스타씨는 "휴대폰과 PDA가 신세대들에게 최고의 선물로 꼽히고 있다"며 "특히 휴대폰은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없어서 못 파는 형편"이라고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광활한 국토 덕분에 유선전화 보급률이 높지 않은 브라질의 경우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휴대전화 가입자수가 조만간 유선전화 가입자수를 추월할 전망이다.
'향후 50년 동안 연평균 3.6%씩 경제가 성장, 2025년에는 이탈리아, 2031년에는 프랑스를 차례로 추월한다'는 브릭스 시나리오. 내수 시장 부활은 브라질이 그 꿈을 이루는 데 청신호임에 틀림없다. 더욱 희망적인 것은 브라질이 룰라의 집권을 계기로 경제개방으로 산업구조의 재편과 더불어 수출을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삼는 장기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실 브라질의 제조업 기반은 탄탄했다. 1901년 전기기차, 1920년 에스컬레이터를 만들었고 지금도 철강산업과 민간 항공기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 하지만 64년 군부정권 집권이후 상당수 기업이 타격을 입었고, 이후 오랫동안 국내 산업 보호정책을 펴오는 바람에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 때문에 지금도 콩, 설탕, 커피, 오렌지, 면화, 쇠고기 등 각종 농축산물이 주요 수출품목이다.
하지만 룰라는 수출 중심으로 산업구조 재편이 불가피하다고 판단, 중소 기업들을 위해 수출세를 면제해주고 각종 세금을 깎아주는 등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폈다. 덕분에 2003년 상반기 모처럼 100억 달러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상파울루공업연맹 마우리스 코스틴 대외협력이사는 "수출은 내수에만 의존해온 기업들에게 돌파구"라며 "수출에 눈을 돌리는 기업이 많아질수록 브라질 경제의 체질은 강화될 것"이라고 했다.
브릭스를 꿈꾸는 브라질에게 가장 든든한 버팀목은 최근 이 나라를 중심으로 변하고 있는 세계경제의 지형.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4개국이 가입한 남미공동시장(MERCOSUR)을 이끌고 있는 브라질은 조만간 출범할 남미자유무역지대(SAFTA·MERCOSUR+안데스공동체 5개국)와 미주대륙 34개국이 참여하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에 남미 종주국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세계 최대의 미래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 인도와 지난해 6월 자유무역협상(FTA) 개시에 합의했다는 사실. 미주대륙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세계 최대의 시장을 주도적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9월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서 세 나라는 미국과 유럽연합(EU)에 대항해 개도국의 시각을 대변했던 G20을 주도하며 동지의식을 확인하기도 했다.
상파울루주정부 경제개발청 카를로스 루케 차관은 "조만간 미국과 유럽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경제블록이 등장할 것이며, 브라질이 중남미의 리더로서 주도하게 될 것"이라며 희망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반복되는 정치적 갈등과 외환위기, 극심한 빈부격차 등 성장의 장애물에 눌려있던 브라질이 마침내 기지개를 켜고 세계 경제의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제는 한국이 움직일 때다.
/상파울루=박천호기자 toto@hk.co.kr
브라질속 한국기업
'미래의 나라' 브라질에는 이미 세계 500대 기업 가운데 350여개 기업이 진출해있다. 수십 년 전부터 잠재력을 인정 받은 만큼 그 동안 웬만한 기업들은 모두 브라질에 진출, 시장 주도권을 놓고 총성 없는 전쟁을 벌여온 셈이다.
국내 기업의 진출은 아직 많지 않은 편. 잠시 시장을 개방했던 199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늘어나다 경기침체가 극심했던 지난해부터 다시 급격하게 줄고 있다. 주요 진출기업으로는 LG전자, 삼성전자, 포스코 등이 꼽힌다.
마나우스 자유무역지대에 사업장을 설치해 1995년부터 현지 생산을 시작한 삼성전자는 현재 모니터, HDD, 휴대폰 등을 생산, 판매하고 있고 지난해말부터 상파울루 인근에 휴대폰 라인을 추가로 투자하고 있다. 97년부터 현지 생산을 시작한 LG전자는 마나우스와 상파울루 인근 따우바떼 등 2개 지역에 사업장을 두고 TV, VCR, DVD 등 영상가전 분야와 모니터, 휴대폰 등 9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최근 브라질에 거세게 불고 있는 정보기술(IT) 열풍을 타고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양 사의 브라질 법인은 특히 모니터 분야에서 시장 점유율 70% 이상을 차지하며 강세를 보이고 있다.
KOTRA 상파울루 무역관 도승환 부관장은 "브라질이 이제 막 문을 열기 시작한 만큼 한국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고 있는 IT 분야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브라질 정부의 상공부차관을 지낸 벤자민 식수 삼성전자 브라질법인 고문도 "이제 막 움트고 있는 브라질 시장에서 초기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한국 기업들은 충분한 역량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도 부관장이 모범사례로 제시한 것은 LG전자 브라질법인의 스포츠 마케팅 전략. LG전자는 상파울루 축구팀을 후원한 덕분에 급속도로 브랜드 인지도를 높였고, 가전분야에서는 필립스, 도시바와 함께 3대 브랜드로 꼽히고 있다. LG전자 브라질법인 조중봉 상무는 "앞으로 현지화 전략을 계속 강화하는 한편, 프리미엄 제품을 앞세워 구매력 있는 중산층 이상의 소비자들을 공략할 것"이라고 말했다.
심상치 않은 것은 최근 브라질에 대한 중국의 투자가 활발해지고 있다는 점. 모든 분야에서 한국을 맹추격하고 있는 중국은 인도와 더불어 브라질이 자유무역지대(FTA) 체결을 추진하고 있는 파트너이다. 삼성전자 중남미 총괄 최승우 상무는 "브라질을 중국에 이어 우리 경제의 또 다른 성장 버팀목으로 활용할 다각도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브라질은 위험 부담도 많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그만큼 고수익을 낼 수 있는 '기회의 땅'입니다. 따져보면 브라질 비즈니스를 하는 모든 경쟁자들이 똑같이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있는 만큼 긴 호흡으로 꾸준하게 투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년 넘게 브라질에서 고군분투해온 최 상무의 조언이다.
/박천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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