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펼치면 거의 예외 없이 두 편의 만화가 실려 있다. 네 칸짜리 만화와 한 컷 만평이다. 네 칸짜리 만화가 형식적 특성상 서술적이라면 그에 비해 한 컷 만평은 함축성을 생명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단 한 장의 그림으로 사안의 핵심과 본질을 선명하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머까지 곁들여. 그런데 요즘 신문 만평을 보자면 만평에 기대하게 되는 욕구가 늘 제대로 채워지지 못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가령 한국일보 만평은 비판 정신은 살아있지만 힘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주고, 중앙일보 만평은 사물을 명명하는 문자 의존도가 너무 높아서 의미가 분산된다.
풍자성, 깊은 여운, 강한 상징성, 재치 있는 비유, 유머의 여유, 해학적 캐릭터, 잘 된 그림 등등. 이런 것들이 만평에서 기대하는 바일 텐데, 이런 만화적 풍자가 얼마나 잘 살아나고 있느냐에 따라 신문 만평 사이의 수준 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
최근 만평의 주요 소재인 조류독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한 번 비교해 보자. 조선일보의 지난해 12월22일자 만평 '조류독감 안 걸리면 뭐하노 팔리질 않는데'가 다만 직설적 설명 수준이라면, 이튿날 한겨레신문 그림판에서는 닭들을 정치개혁법안을 개악해 놓은 국회의원에 비유하고 있다. 하지만 1대1 대응으로 직설적 비유에 머문 점이 아쉽다.
그에 비해 부산일보 23일자 부일만평은 '여의도 조류독감' "우리가 반성할 거라는 편견은 버려"에서 국회의사당을 본뜬 닭장 모양, 코미디언의 유행어 활용, 그리고 세 야당 당수의 후안무치한 표정을 익살스럽게 담음으로써 비유와 풍자가 살아났다.
또 미국 탐사선의 화성 착륙 소식을 두고도 조선일보 만평에선 다만 만화로서의 익살만 담고 있지만, 문화일보 1월5일자 만평은 그것을 다시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에 연결하고 있고, 경향신문 6일자 만평 '외계생명체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 수도'에서는 '구시대 색깔론'을 들고 나온 어느 정치인을 외계인에 빗대 만평의 생명인 정치적 익살을 잘 구사하고 있다.
풍자란 직설적으로 공격하기 힘든 대상에 대해 함축적 완곡어법으로 에둘러 공격하는 것인데, 여기서 재치 있는 비유와 우스개가 동원되고, 그러한 풍자적 소통의 결과로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풍자는 직접적으로 제어할 힘을 갖지 못한 민중, 사회적 약자와 친화력이 강하고, 유머 정신은 인간을 낙관적으로 보는 자유주의와 더 가깝다. 권력집단은 굳이 에둘러 표현할 이유가 없다. 힘이 있으니까. 이들은 오히려 자신의 행위와 결정에 고귀한 가치를 덧씌우기 위한 가식적 언사를 주로 구사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과연 믿고 따라줄지 노심초사하는 쪽이다. 인간에 대한 비관적 관점을 갖고 늘 의심한다. 즉, 권력자의 언어가 본질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면, 풍자는 그렇게 은폐된 본질을 백일하에 드러낸다는 점에서 권력 비판이 된다.
만평은 특히 만화적 형식과 상상력을 동원하기에 풍자적 잠재력이 그 어떤 형식에 비해서도 크다. 하지만 요즘 신문 만평은 행정부 권력 편과 입법부 권력 편으로 나뉘어 비아냥과 냉소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는 정치권력을 풍자해야 하는 만평이 오히려 그에 종속된 꼴이다. 신문 독자는 광범위한 계층이지만 특히 만평 독자는 그 가운데에서도 힘없는 약자들임을 양찰해 주길 화백님들께 고한다.
/충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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