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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칼럼/심형래 영구아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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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칼럼/심형래 영구아트 사장

입력
2004.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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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우리나라에는 유명한 코미디언 출신 영화감독이 하나씩 있다. 기타노 다케시와 심형래(46) 영구아트 사장. '하나비', '소나티네', '키즈 리턴' 등으로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명감독으로 인정받는 기타노 감독과 달리 심 사장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바보 연기 때문에 아직도 '바보 영구'로 기억되고 있다.영구 이미지는 그가 영화계에 진출하면서 큰 선입견으로 작용했다. 충무로 본고장 출신이 아니라는 이력 때문에 영화계에서도 '이단아' 취급을 했고, 어린이용 영화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보기도 전에 '유치하다'는 평가부터 내렸다.

1999년 DJ 정부로부터 신지식인에 선정됐을 때 놀라워 했던 사람들도 정작 용가리가 국내 개봉 후 비판에 시달리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세계 수준을 뛰어넘는 SF 영화를 만들겠다는 그의 집념은 망상가의 헛소리쯤으로 치부됐다.

'디-워' 외자 유치로 재조명

용가리의 실패 이후 그렇게 우리 머릿속에서 잊혀져 가던 심 사장이 최근 다시 조심스럽게 여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올해 연말 개봉 예정으로 2000년 초부터 제작해 오던 영화 '디-워(D-WAR)'에 미국 록우드사가 1,500만달러(약 180억원)를 투자하기로 계약한 후부터다. 국내 영화에 대한 단일 외자 유치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미국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의 50%를 가져갈 예정인 록우드사는 자사가 투자한 영화관과 케이블채널 등에서 수시로 디-워의 예고편을 방송할 예정이어서 흥행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 대만, 중국과도 투자 협상이 진행 중이다.

이렇게 거액의 외자 유치가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은 해외 제작사들에게 '영구가 제작하는 유치한 영화'라는 편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데모 영상과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캐릭터,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일반적인 미국 블록버스터 제작비보다 훨씬 저렴하게 대작 SF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데 높은 점수를 주었다. '매트릭스'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물론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 컴퓨터그래픽이 많이 사용된 미국 블록버스터 영화의 제작비는 편당 1억달러(1,200억원)가 넘지만, 디-워의 총 제작비는 4분의 1인 300억원에 불과하다.

따라잡느니 뛰어넘겠다

심 사장은 "외국 회사들이 한국에서 만든 영화를 미국의 블록버스터 급으로 생각하고 계약에 나서 정말 뿌듯하다"고 말했다. 이 말에는 '기술로 미국 영화를 뛰어 넘겠다'는 그의 목표에 어느 정도 다가섰다는 자신감이 담겨 있다. "미국이 쓰는 기술을 따라 하기만 하면 영원히 그 벽을 못 넘습니다. 뛰어 넘어야죠." 그래서 영구아트는 처음 영화를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기술을 직접 개발했다. 디-워에 쓰인 컴퓨터그래픽 영상은 '렌더맨'처럼 유명한 미국의 특수효과용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로 제작한 것이다. 심 사장이 보여 준 디-워의 동영상에는 대낮에 조선시대 마을과 현대의 LA 도심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이무기의 피부가 아주 섬세하게 표현돼 있었다.

컴퓨터 그래픽 캐릭터가 '대낮'에 등장한다는 것은 대단한 진보다. 용가리와 미국의 고질라는 컴컴한 밤에만 다녔다. 캐릭터 표면을 섬세하게 만들지 않아도 주변이 컴컴하면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10년 전, '영구와 공룡 쮸쮸'에 등장할 공룡을 만들기 위해 흙을 반죽하던 시절에 비하면 디-워의 이무기는 엄청난 발전이다. '티라노의 발톱'을 가지고 칸을 방문한 그를 충무로는 비웃었지만, 그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디-워는 없었다.

"사람들은 항상 결과만 가지고 평가합니다. 어떤 영화가 잘 됐는지 안 됐는지는 흥행 성적이 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칼 루이스가 어느 날 갑자기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과정도 중요합니다."

오곡동에서 꾸는 꿈

영구아트는 디-워의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양평동 시대를 마감하고 지난해 말 서울 강서구 오곡동에 새로운 스튜디오를 지어 이사했다. 컴컴하고 큰 창고 속에 들어 차 있는 작은 헬리콥터와 조선시대 건물, 도시의 빌딩 등 크고 작은 미니어처들에는 영구아트 직원들이 쏟은 열정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논밭으로 둘러싸여 황량한 오곡동으로 스튜디오를 옮긴 것도 미니어처가 많이 사용되는 SF 영화를 찍는데 훨씬 편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곡동 스튜디오는 디-워의 성공 외에 좀더 큰 꿈도 갖고 있다. 영구아트를 중심으로 세계 블록버스터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컴퓨터그래픽 등 후반작업을 담당하는 업체들을 한 곳에 모아 '미디어 실리콘 밸리'를 만드는 것. 정부 주도로 이루어질 일이지만 현재 국내 SF 전문 제작사가 영구아트 하나뿐인 만큼 인재 양성이나 소프트웨어 제공 등의 역할을 영구아트가 주도적으로 하겠다는 포부다. 먼 훗날의 일이지만 영구아트가 만든 여러 영화가 성공하면 넓디 넓은 오곡동 논밭에 미국의 유니버설 스튜디오 같은 테마파크를 지을 생각도 있다. 모든 건 디-워의 성공에 달려있다. 출발은 좋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시놉시스와 데모 영상을 보고 평면적 스토리, 배우들의 밋밋한 연기 등을 지적하며 성공을 의심스러워 한다. 그러나 설혹 또 다시 실패하더라도 심 사장은 이전처럼 뚝심으로 다시 한번 일어서 SF 영화에 매달릴 것이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 심형래 사장은 누구

▲ 1958년 서울 출생

▲ 여의도고, 고려대 식품공학과 졸업

▲ 82년 코미디언으로 데뷔

▲ 84년 '각설이 품바타령'(남기남 감독)으로 첫 영화출연

▲ 93년 '영구아트무비' 설립, 감독 및 제작자 데뷔

▲ 출연작 : 외계에서 온 우뢰매(86), 영구와 땡칠이(93) 등 다수

▲ 감독 및 제작 : 영구와 공룡 쮸쮸(93), 파워킹(95), 용가리(99) 등 다수

▲ 수상경력 : KBS 코미디대상(88/90), 아시아위크지 선정 '21세기 아시아지도자'(컴퓨터와 기술공학 부문), 공보처 신지식인 1호, 소파상 예술부문(99), 씨네21 선정 충무로 파워 50인(99), 스포츠서울 선정 '15년을 빛낸 연예인'(2000)

▲ 부인 김주희씨와 1녀

● 영구아트는 어떤회사

한국 유일의 SF영화 전문제작사. 1993년 4월, 한국만의 독자적인 기술로 SF 영화를 만들어 세계 시장을 석권하겠다는 포부로 심형래 사장이 설립했다. 영구아트와 심 사장, 그리고 직원들이 걸어 온 10년은 온통 가시밭길이었다.

첫 작품 '영구와 공룡 쮸쮸'는 공룡을 제작하다 세월을 다 보냈다. 찰흙으로 만든 공룡은 자꾸 부서져서 다양한 재료로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고, 그 결과 간신히 만들어진 공룡은 무게가 200㎏이 넘어 안에 들어간 사람이 질식할 정도였다. 다음 작품도 공룡 영화. '티라노의 발톱'을 들고 칸 영화제에 간 그를 충무로 사람들은 비웃었다. 흥행에서도 참패해 그 해는 '영구와 불괴리', '할미캅', '심비홍' 등 비디오 전용 영화를 출시하며 근근히 버텼다.

1995년에 나온 '파워킹'은 국내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외국 배우를 기용해 다시 찍은 버전이 해외 수출에 성공, 130만 달러를 벌어 들였다.

또 하나의 '용' 영화 '드래곤 투카'는 실패했지만 다음 작품인 '용가리'가 칸 영화제에서 270만 달러의 선 수출계약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영구아트와 심 사장은 DJ 정부에 의해 '신지식인'으로 선정되는 등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용가리는 1999년 결국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36억원을 더 들여 수출용으로 절반 이상 재제작한 '2001년 용가리'는 외국에서 짭짤한 수익을 거뒀지만, 해외 배급을 맡은 에이전트가 불공정 계약을 맺는 바람에 정작 회사는 큰 이익을 얻지 못했다.

영구아트는 지난해 12월 김포공항 근처의 오곡동에 지은 새 스튜디오로 이사했다.올해는 연말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개봉할 예정인 '디-워'에 매진할 계획이다.

● 심형래사장 만나보니

기자가 오곡동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심형래 사장은 구석구석을 직접 보여 주며 열심히 설명했다. 스튜디오 중앙 홀 벽면을 장식한 영구아트의 과거 영화 포스터와 각종 장비, 창고 안의 미니어처도 보여주었다.

솔직하고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한 심 사장과의 만남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심 사장은 사무실에서는 디-워의 데모 영상을 보여주었다. 또 '몬스터 주식회사', '스타워즈 에피소드 2' 등 미국 블록버스터 영화의 데모 영상과 비교하면서 어떤 점에서 디-워가 더 우월한지 역설했다.

솔직함과 순수함이 오히려 문제가 돼, 계약을 잘못하거나 사기꾼을 만나 배신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심 사장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자살 일보 직전까지 갔던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보다 못한 사람과 직원·식구들 생각을 하면서 '한번만 더 하자'고 용기를 냈습니다."

그는 담배는 피우지만 술은 3년 전부터 전혀 안 마신다. 직원들도 그를 따라 금주 원칙을 지키고 있다. 표면적인 이유는 미니어처 폭파 장면을 연출할 때 조금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지면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다. '세계적 영화로 10억 달러를 벌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맹세 때문이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디-워가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고생한 직원들에게 30억원씩 나눠 줄 생각입니다. 1억 달러를 번다면 3억원을 줄 생각이고요." 영구아트 직원들은 요행이 아닌 피땀 어린 '로또복권'에 당첨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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