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에서 나만큼 원장수녀 역을 많이 맡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신의 아그네스'의 엄한 원장수녀에서 '넌센스'의 귀여운 원장수녀까지. 사람들은 내가 연기한 원장수녀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연극 배우 박정자를 원장수녀 역에 묶어 두려는 그 모든 시도가 싫었다.1983년 윤석화가 나오는 '신의 아그네스'를보면서 나는 정신과 닥터 역에 매력을 느꼈다. 닥터 역은 원장수녀보다 배우가 연기할 요소가 많다. 닥터는 개인적 고민, 인간으로서 미성숙한 내면, 성공적이지 못한 인생등 심리상태가 복잡한 여자다. 주인공 아그네스가 갓 태어난 아이를 탯줄로 목졸라 죽였다는 사실을 캐내려고 하지만 결국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인간이다. 따라서 연극이 진행될수록 닥터의 갈등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나는 무대 위에서 예쁜 옷 입고 왔다 갔다 하는 그저 행복한 배역보다는고통이 많은 인물을 선호한다. 나의 연기는 사랑보다 갈등에 더 어울리니까.
내가 이 연극에 나온다면 사람들은 원장수녀 역이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겠지. 내 예상은 101% 적중했다. 그 즈음 KBS 라디오의 전화를 받았다. '신의 아그네스'를 라디오 드라마로할 예정인데 출연해 줄 수 있겠느냐는. 나는 물었다. "어떤 배역을 생각하세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원장수녀 역이라는 대답이었다. 예상이 적중한 것이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다만 단막극인 데다 흥미도 있어서 응했다. 그런데 두 시간 후에 MBC 라디오에서 같은 용건의 전화가 왔다. 이번에도 나는 물었다. 대답은 같았다. 조금 전에 같은 일로 KBS와 약속했기 때문에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이란 게 얼마나 곤란한 것인지, 또 사람들 마음 속에 고정관념이 얼마나 많이 들어차 있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한참 오래 뒤에 한 연출자가 또 나에게 '신의 아그네스'를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몇 년 전의 그 질문을 되풀이했다. 어떤 배역을 생각하고 있느냐? 역시 원장수녀였다. 한심했다. 도대체 연출하는 사람들 생각이 그 정도밖에 안 되나? 마치 내가 '위기의 여자'를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박정자라는 배우를 액자나 항아리 속에 넣어 두고, 생각하고 싶은 만큼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내가 꼭 원장수녀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내가 하고 싶은 건 닥턴데." 얼마 후 연극 연출가 윤호진이 전화를 했다. 실험극장에서 '신의 아그네스'를 리바이벌할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제안도 원장수녀 역이었다. 결국 맡을 수밖엔 없었지만.
극단 자유에서 '햄릿'을 할 때 나는 모가비라는 광대패의 우두머리 역을 맡았다.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는. 그러나 얼마 동안 나는 왜 무당만, 어머니만, 광대패의 우두머리만 해야 하는지 고착된 내 역할에 진절머리가 났다. 왕비 역을 맡지 못했다는 것보다 내가 광대 우두머리 같은 역을 해야 한다는 남들의 고정관념이 싫었다. 하지만 연습이 끝나고 막이 오르고 난 후 광대 하기를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왕비보다는 덜고통스럽게, 그리고 무대 전체를 휘저으며, 장면 사이사이를 넘나들며 뛰어다닐 수 있었다. 철저한 광대 기분으로.
나는 배우다. 나는 왕비도 할 수 있고 창녀도 할 수 있다. 세상 모든 배역을 다 할 수 있고 또 잘 해낼 수 있다. 오만이지만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한가지만 생각할까. 모든 일엔 겹겹이 비밀이 있고 또 다른 상황들이 잠복해 있다는 걸 왜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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