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와 전쟁에서 벗어난 한국 스포츠계는 1954년 대한체육회를 사단법인체로 전환하면서 도약의 원년을 맞았다. 한국이 아시안게임과 월드컵 축구에 첫 출전하며 본격적으로 세계무대 진출을 시작한 것도 이 해이다. 이후 88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까지 개최하며 세계의 스포츠 강국으로 급성장한 한국의 '스포츠의 50년'을 뒤 돌아 보며 역사의 주인공들을 찾아 근황을 들어 본다.
1980.1.3.
소매치기라는 어두운 과거를 딛고 WBC(세계권투평의회) 라이트 플라이급 왕좌에 올랐던 김성준의 신화는 15개월 만에 무너졌다.
일본 도쿄 고라쿠엔홀의 4차 방어전에서 김성준은 머리를 들이밀며 돌진하는 도전자 나카지마 시게오에게 15회까지 무수한 연타를 허용하고 피투성이가 된 끝에 판정으로 패했다. 신정연휴 마지막 날 TV앞에 모여 앉은 국민들은 1시간 내내 두들겨 맞기만 하는 김성준을 보면서 와지마 고이치에게 주먹 한번 제대로 날리지 못하고 WBA(세계권투협회) 주니어미들급 타이틀을 내준 '유제두 졸전(76년 2월 도쿄·15회 ko패)의 재판'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범죄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준 복싱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던 김성준은 이후 체급을 높여 WBC 플라이급 타이틀에 도전하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82년 링에서 내려와야 했다.
내성적이고 심약한 그는 험한 사회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꽃가게, 음식점등을 경영하고 운수업에도 손을 댔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이혼과 동거에 따른 갈등에 실어증까지 겹치면서 삶의 의욕을 상실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마침내 89년 2월 중구 남대문의 6층 빌딩 옥상에서 투신, 36세로 생을 마감했다.
김성준은 부친의 사업실패후 중학 2년 때 가출, 신문과 껌팔이 구두닦이 등을 전전하다가 광화문 일대의 소매치기 조직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복싱을 시작했다. 75년에는 한국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랐지만 검찰에 꼬리를 잡혔고 결국 그의 자질과 사회적 충격을 고려한 검찰의 권유로 자수했다.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 난 후에는 후원회장이 된 담당검사의 도움으로 복싱을 계속해 78년 1월 동양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에 오르고 그 해 9월 태국의 복싱영웅 네트로이 보라싱의 세계타이틀에 도전, 오른쪽 눈 언저리를 찢겨 피를 흘리다가 3회 회심의 오른쪽 어퍼컷 한방으로 KO승을 거두었다. 한국의 5번째 세계챔피언.
'검은 손'이 '영광의 손'이 되던 날 그는 "나를 갑자기 영웅으로 만들지 말아 달라. 대신 내 어두웠던 과거도 들추지 말아달라" "건방지지만 불우 청소년에게 작은 희망이 되고 싶다"며 눈물을 흘렸다.
1336.1.8.
한국 프로야구의 국보급 투수 선동열이 11년간 몸담았던 해태 타이거스의 옷을 벗고 일본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했다.
62년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한 백인천에 이어 두번째 일본진출. 일본 최고 명문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치열한 경쟁을 벌인 나고야의 주니치에 들어간 선동열은 '나고야의 태양(SUN)'. 이라는 애칭대로 구원투수로 활약하며 4년간 10승 4패 98세이브, 방어율 2.70의 기록을 세웠다.
2003.1.11.
한국 테니스 사상 최고의 날이었다. 큰 관심없이 TV앞에 앉았던 시청자들까지 160분간 숨돌릴 틈 없이 치고 받는 격전에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ATP(세계남자프로테니스협회) 투어 대회인 호주 시드니의 '아디다스 인터내셔널' 결승에서 세계 4위인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스페인)와 맞선 이형택(당시 87위). 그는 첫 세트를 4-6으로 뺏겼음에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기술과 힘, 기싸움에서 모두 만점의 경기를 펼쳐 남은 두세트를 내리 7-6으로 따내고 극적인 우승을 이루었다.
골프는 몰라도 파워가 월등한 서양선수들과 직접 맞부딪치는 테니스에서의 우승은 불가능하다는 통념을 무너뜨린 기적 같은 승리였다.
199631.13.
적지 도쿄에서 한국의 세번째 동양챔피언이 탄생했다.
한국복서로는 이전에 주니어미들급의 강세철과 미들급의 김기수가 동양 챔피언에 올랐으나 강세철은 방어에 실패, 김기수 한명만 남아있던 상황.
푸트웍과 스피드가 좋았던 아웃복서 강춘원은 일본의 이시야마 노쿠로를 4차례 다운1984.1.14.
배구를 겨울 스포츠로 정착시키기 위해 창설한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대회가 개막했다. 개막 직전 '한마음리그'에서 '내셔날리그'로 바꿨다가 굳이 대회명칭에 외래어를 써야 할 이유가 없다는 당시 체육부의 반대로 제동이 걸려 단순히 '대통령배'로 이름을 붙였던 이 대회는 90년대 '슈퍼리그'로 했다가 현재 진행중인 21회 대회에서 'V-투어'로 개명했다.
남녀 각 10개팀이 참가한 이 대회는 라이벌 농구의 '대잔치' 원년대회보다 한 달 늦게 시작했지만 3개월간 전국 8개 도시를 순회하며 관중동원에 성공, 배구를 대중적인 인기종목으로 부상시키는데 기여했다. 장윤창 강만수 강두태 유중탁 이인 문용관 이은경 시킨 끝에 9회 TKO 승을 거두었다.
앞서 김현 이동춘 문창수가 이시야마에 도전해 모두 실패했다가 4번만에 타이틀을 가져 온 것이라 의미는 더욱 컸다.
이로써 동양타이틀의 수는 일본이 5, 한국 2, 필리핀 태국 각 1개가 되었다.
박미희 등의 인기가 폭발하는 가운데 고려증권과 미도파가 각각 원년대회의 남녀 정상을 차지했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그때 그사람/前 배구스타 장윤창
"팬들로부터 받은 과분한 사랑에 보답하고자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작은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본인의 말대로 장윤창(44)은 배구코트에서 누구보다 많은 사랑과 영광을 누렸던 80년대 최고의 스타이다.
77년 인창고 2년때 최연소 국가대표로 선발돼 배구사상 유일하게 고교생으로서 베스트 6에 들어가고 91년 9월까지 14년의 최장수 국가대표의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84년 1월 창설된 겨울시리즈에서는 첫해부터 4년 연속 인기상을 획득해 아직까지 이 부문 기록을 갖고 있으며 두 차례나 MVP로 뽑혔다.
'돌고래'라는 별명답게 195㎝의 큰 키를 갖고도 유연하면서도 힘차게 솟구친 후 내리꽂는 왼손 점핑 서브와 스파이크는 10대 소녀에서 노년층까지의 폭 넓은 팬들을 열광시켰다. 소속팀 고려증권은 그 동안 겨울시리즈를 5차례나 석권했다
95년 미국 조지 워싱턴대로 유학을 떠난 그는 영어 한마디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운동보다는 힘들지 않다'고 자위하며 버틴 끝에 4년 만에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내에 돌아와 2년 전 한체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은퇴 10년이 된 지금 그는 모교 경기대의 인기 교수이다. 또 꿈나무 지도를 책임지는 대한배구협회의 기술지도 이사를 맡고 있다. 하지만 장윤창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직함은 봉사단체인 사단법인 '함께 하는 사람들'의 상임 대표이다.
"선수시절에는 오로지 이기는 것, 정상에 오르는 것만 생각하고 받을 줄만 알았지 주변을 살피는 것은 부족했죠. 그런데 미국 유학 중 성공한 사람들이 사회에 더 봉사하고 기부하는 것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어요. 더구나 저희 국가대표 선수들은 사회에 더 많은 빚을 진 처지 아닙니까."
그는 98년 귀국하자 마자 탁구스타 현정화와 마라톤의 황영조, 양궁의 서향순, 농구의 김현준(사망), 유도의 전기영과 뜻을 함께 해 70명의 스타를 모았다.
그리고 매달 한번씩 재활원 고아원 양로원 소년원 등 불우시설들을 찾기 시작했으며 이제 일반인 봉사자도 4,000명 정도로 늘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