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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 "악마의 고리" 끊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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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 "악마의 고리" 끊어내기

입력
2004.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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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대통령 선거 전날 정몽준씨가 노무현 후보 지지를 거두자, 노 후보 지지자 가운데 일부는 밤새 인터넷을 통해 권영길 후보 지지자들에게 긴급 구호를 요청했다. 구체제로의 회귀를 막기 위해 진보 정치의 꿈을 잠시만 미루고 노 후보를 지지해달라는 것이었다. 권 후보가 실제로 받은 표가 그 직전까지의 여론조사 지지율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은 그 요청이 어느 정도 호응을 얻었음을 뜻한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말하자면 지난 대선 때 노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자유주의적 유권자들은 진보주의자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경위 바른 자유주의자라면 17대 총선을 그 빚 갚음의 기회로 선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빚을 갚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진보주의자들에게 상투적으로 들이댔던 사표(死票) 논리를 팽개치는 것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 자신도, 자기 선거구에서 출마한 자유주의 정당 후보가 변변치 않을 때는, 기꺼이 진보 정당 후보를 지지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또는 적어도, 정당명부식 1인2표제가 도입될 경우, 자유주의 정당 후보와 진보 정당으로 지지를 나누어 보내는 것을 포함한다.

기자는 진보 정당 지지자는 아니지만, 이번 총선에서 진보 정당 후보가 되도록 많이 원내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우리 정치의 이념적 정상화, 곧 균형을 위해서다. 지금 우리 정치의 두 주류는 극단적 보수주의 세력과 온건 자유주의 세력이다. 정상적 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적어도 원내에는 없다. 이런 왼쪽 날개의 결여는 시민의 생존권·생활권 같은 사회·경제 영역만이 아니라 사상의 자유 같은 정신 영역까지 불구로 만들고 있다.

재작년 지방선거에서 진보 정당들은 8%를 웃도는 지지를 얻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진보 정당의 프로그램에 공감하는 유권자 층이 얇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지지율은 국회 의석에 반영되지 못한다. 지역주의와 소선거구 다수대표제가 결합해서 진보 정치 세력에 대해 진입 장벽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주의야 하루이틀에 없어질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선거 제도다. 그러나 위헌 사태를 맞은 지금의 선거법이 개정된다고 해도, 진보 정당들이 바라는 대로 지역구 대표와 비례대표 비율을 1:1로 하는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채택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선거법 개정은 기존 원내 정파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위헌성을 최소한으로 치유하는 데 그칠 것이다.

여기서 진보 정치의 목을 옥죄는 악마의 고리가 나온다. 진보 세력이 국회에 들어가려면 선거법의 바탕을 바꿔야 한다. 그러나 선거법의 바탕을 바꾸려면 진보 세력이 원내에 들어가야 한다. 기존 원내 세력은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 규칙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법이라는 진입 장벽 때문에 진보 세력은 원내에 들어갈 수 없고, 진보 세력이 원내에 없으니 그 장벽은 치워지지 않는다. 어디서라도 이 고리를 끊어야 하지 않겠는가? 17대 총선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이 이 고리를 끊어내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자유주의 정당이 분열돼있는 지금이 차라리 호기다.

자유주의적 유권자들의 진보 정당 지지는 선의의 거래 차원에서도 헤아릴 만하다. 헌법이 바뀌지 않는 한, 그리고 극보수 정파가 몰락하지 않는 한, 한국 유권자들은 17대 대선에서도 극보수 후보와 자유주의적 후보 사이의 선택을 강요 받을 것이다. 만약에 지난 대선에서처럼 두 후보의 지지율이 엇비슷하다면, 자유주의적 후보는, 비록 그에게 만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두 후보 가운데서 그를 더 작은 악으로 여기는 진보주의자들의 지지에 기대지 않고서는 집권할 수 없다. 그 때 진보주의자들에게 떳떳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자유주의자들이 진보주의자들의 '고리 끊기'를 도와야 한다.

고 종 석 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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