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4일 정부의 무성의한 대응으로 중국에 억류됐던 탈북 국군포로 전용일씨가 극적으로 귀환하면서 국군포로 문제가 다시 관심사로 떠올랐다. 1994년 10월 43년만에 귀환한 조창호 소위와 이번에 귀국한 전용일씨를 포함해 유엔군과 공산군측의 포로교환이 끝난 뒤 한국으로 돌아온 포로는 34명. "단 1명의 국군포로도 없다"는 북한의 주장에도 불구, 국군포로 귀환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는 정전협정 과정에서 이 문제를 분명히 매듭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전협정 체결 다음날인 53년 7월28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첫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에서 양측은 8월5일부터 포로송환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유엔군사령부는 송환을 희망한 공산군 포로 7만5,823명(북한군 7만183명·중공군 5,640명)을 돌려보냈고, 공산군측은 1만2,773명(한국군 7,862명·유엔군4,911명)을 송환했다.북한이 부상포로라며 인도한 684명과 추가 송환 인원 10명을 포함해 공산군이 유엔군측에 돌려보낸 포로는 한국군 8,343명과 유엔군 5,126명 등 총 1만3,469명. 그러나 국방부는 최근 자료에서 "당시 국군포로 숫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고 전제한 후 5만∼8만명에 달할 가능성을 제기했다. 유엔군사령부가 53년 8월 유엔에 제출한 '휴전에 관한 특별보고서'에서도 한국전 당시 최종 국군포로 및 실종자 수를 8만2,318명으로 집계했다.
북한에 몇 명 남아있는지 몰라
북한은 국군포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 정부는 다만 귀순자와 탈북자, 국내 연고자 등의 진술을 통해 현재 생존한 북한 내 국군포로가 대략 500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국방부는 97년 행방불명자 신고와 병적부 확인을 통해 최종 집계한 1만9,409명의 '한국전 참전 행불자(실종자) 명부'를 공개했으며, 이 가운데 미송환 국군포로가 상당수 포함돼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 명부에는 군적이 없는 학도의용군과 유격대요원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국군포로의 생활상
53년 포로교환 이후 귀환한 국군포로들의 진술을 종합해 볼 때 국군포로들은 북한 사회에서 최하위 계층으로 분류돼있다. 특히 90년대 중반 이후 악화한 북한 식량난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가 국군포로 등의 증언을 바탕으로 발간한 '국군포로 문제: 실상과 대책'에 따르면 이들 대부분은 한국전 당시 생포된 후 북한군으로 재징집돼 전선이나 강제노역에 투입됐다. 북한은 56년 6월 미송환 국군포로들을 '해방전사'로 명명하면서 석방한 뒤 공민으로 편입시켰으나 이들은 60∼70년대 주로 광산이나 통제대상 공장, 집단농장으로 추방돼 국가보위부로부터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통제된 삶을 살아야 했다.
많은 국군포로들이 결혼해 가정을 꾸렸지만 가족까지 성분 불량자 가운데 최하급으로 분류돼 진학이나 사회진출 기회가 제한됐고, 일부는 국군포로라는 이유로 이혼 당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정부는 파악하고 있다.
/김정호기자 azure@hk.co.kr
■탈북알선 브로커 극성
"브로커들이 악용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전용일씨에 대한 정확한 보상금액을 밝히기 힘들다."
국방부가 지난달 24일 탈북 국군포로 전용일씨의 귀환 사실을 공식 발표하면서 덧붙인 이 같은 설명에는 탈북 알선 브로커에 대한 정부의 뿌리깊은 불신감이 배어 있다. 현지 공관은 전씨가 지난 여름 탈북한 후 대사관 등에 직접 귀환 가능 여부를 문의하는 대신 대리인을 통해 신원을 밝힌 점 등을 들어 브로커의 개입 가능성에 무게를 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부가 500여명으로 추정되는 생존 국군포로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의 안전 확보와 남한에 거주하고 있는 가족들의 신원보호가 목적이지만 브로커에 악용될 소지를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국군포로가 브로커의 표적이 되고 있는 이유는 단순 탈북자보다 정착금 등 각종 명목의 보상금을 10배나 많이 받기 때문이다.
전씨의 경우 실종 이후 계속 쌓여온 봉급과 주택구입자금 등을 포함해 최소 4억여원을 받게 된다. 브로커들은 알선료를 충분히 챙길 수 있다는 계산으로 국군포로의 탈북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전씨의 한국 귀환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일부 브로커가 중국을 떠돌고 있는 탈북 국군포로의 신병확보에 집중적으로 뛰어든 사실도 최근 정보기관에 포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탈북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활동하고 있는 브로커의 단속과 적발은 쉽지 않다. 이들 브로커들은 점조직으로 이뤄져 있어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일부는 북한 정보를 수집하는 각국 정보기관의 '블랙요원'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현재 북한을 빠져 나와 중국과 러시아에 체류하고 있는 탈북자 중 국군포로가 일부 포함돼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소식통은 "브로커들은 '명단과 주소만 있으면 북한에서 누구든 빼올 수 있다'고 말할 정도"라며 "이들의 개입이 계속되는 한 500여명으로 파악되는 생존 국군포로들은 송환 과정에서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용일씨 귀환 늑장대응등 "정부 무관심이 더 문제"
한국전쟁 포로교환 직후 유엔군측은 자체 조사를 통해 공산군측이 한국군 1,647명과 미군 389명을 포함해 유엔군 포로 2,233명을 송환하지 않았다며 1960년대까지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를 통해, 그 후로는 군정위 유엔군측 수석대표 서한을 통해 북측에 해명과 송환을 거듭 요청했다. 그러나 북한은 "국군포로는 없다"며 "남측이 전쟁 중 석방한 반공포로 2만7,000명이야말로 억류 포로"라고 맞섰다.
정부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이 문제를 제기, 마침내 지난해 9월 4차 남북적십자회담에서 국군포로 및 납북자 생사확인문제를 협의·해결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했으나 그 후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는 북한이 탈북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국군포로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북측은 이산가족 상봉으로 남측 가족을 만난 국군포로를 '국군으로 복무하다 전향해온 자'로 규정하고 있다. 상당수 국군포로들이 북한에서 새로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점도 송환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탈북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는 자국민 보호에 소극적인 '정부의 무관심'을 더 큰 문제로 보고 있다. 납북자가족협의회 최우영 회장은 "전용일씨를 비롯한 국군포로 및 납북자 송환과정에서 정부는 늑장대응으로 일관하다 언론 등에서 문제가 제기돼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며 "인권변호사인 노무현 대통령조차 자국민의 인권문제에 소극적이라는 점에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시민단체들은 "비전향 장기수를 북한에 송환하면서 북한 억류 국군포로 및 납북자 귀환을 협상카드로 제시하지 않은 점은 중대한 실책"이라는 지적도 제기한다.
반면 미국은 한국전 당시 숨진 미군 유해 발굴을 위해 북한에 거액을 지원하고 있으며, 서독도 통일과정에서 시민단체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동독 수용소에 억류된 정치범의 송환을 추진했다. 일본 정부 역시 납북자 귀환을 북일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전씨 귀환과정에서 잇따라 혼선이 빚어지자 정부는 관련기관의 업무분장을 명문화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국군포로 관련 종합대책을 수립하고 관련 업무를 조정·통제하며, 통일부는 재북 국군포로에 대한 생사확인 및 송환 관련 대북협상을, 외교통상부는 제3국 체류 국군포로의 국내송환 추진을, 국가보훈처는 귀환하지 않은 국군포로 유가족에 대한 보훈혜택 제공을 맡는 등 부처별 업무가 구분됐다.
정부는 또 유엔 총회나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국군포로 문제가 논의될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계속하고, 유엔인권위 청원서 제출운동 등을 지원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으나 여전히 '검토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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