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0일 오후3시 모스크바 부도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신(新)아르바트 거리. 밤이 길어 이 시간만 되면 어두워지는 게 모스크바의 요즘 풍경이지만 신아르바트 거리는 예외이다.마치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를 방불케 하는 카지노의 대형 네온사인들이 여기저기 불야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 다른 것이 있다면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가 주로 관광객을 위한 시설인 데 비해 모스크바의 카지노는 주로 내국인이 이용한다는 점이다.
신아르바트 거리 뿐 아니다. 모스크바에서는 카지노 영업이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카지노를 개장할 수 있다. 너도나도 카지노 영업에 뛰어들어 모스크바에는 지금 러시아정교회 성당보다도 카지노가 많다.
경제 시사주간지 엑스퍼트의 알렉산더 유게니에비치 이반터 경제담당 부국장은 "러시아에서는 소득 증가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오락 및 유흥 문화가 발전하지 못한 채 유독 카지노만 기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대국 위한 성장동력 못찾아
최근 러시아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장밋빛 전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너무 많다. 공산체제의 잔재들이 여전히 사회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가운데 시장경제의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2050년 러시아가 'G6'에 포함될 것이라는 골드만삭스의 브릭스보고서에 대해서도 회의적 시각이 적지 않다.
러시아 최대 경제지 코메르산트의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바둘 경제정책국장은 "최근 5년간 러시아 경제가 성장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국제유가 상승에 힘입은 것이지 정부 정책이 성공했다거나 경제발전의 새로운 동력이 확보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며 "시장의 법칙을 지배 받기 마련인 국제 유가가 계속 상승할 순 없을 것이고 오히려 내년부턴 하락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앞으로 이를 어떻게 극복할 지가 과제"라고 밝혔다.
경제학 박사로 2002년 베스트 경제 저널리스트로 선정된 그는 "경제라는 것은 1년 후도 예상하기 힘든 것인데 50년 후를 지금 얘기한다는 것은 사실 넌센스"라며 "푸틴 대통령도 2010년까지 국민소득을 2배로 올리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매년 8%이상의 성장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실현가능성이 적은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빈부격차, 관료주의 과제
빈부격차 심화도 해결돼야 할 과제이다. 엑스퍼트의 이반터 부국장은 "체제 전환 과정에서 올리가르히라고 불리는 독점재벌들이 국부를 독차지한 반면 전인구의 40%는 최저 수준의 생계유지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며 "사회주의 국가의 평등을 경험한 이들의 박탈감이 고조될 경우 사회불안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한국이 97년 외환위기 당시 전국민의 금모으기 운동으로 위기를 극복한 반면 러시아에서는 올리가르히들이 98년 모라토리엄 당시 자산을 해외로 빼돌리기 바빴다"고 지적한 뒤 국민적 공감대가 먼저 형성되지 않는 한 러시아가 신흥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긴 힘들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러시아의 관료주의를 가장 큰 장애로 꼽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일부 대기업의 경우 관료주의를 넘을 수 있는 수단과 자원을 갖고 있지만 중소기업들이 극복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관료주의가 비즈니스 의욕을 저하시킨다는 것. 한 사업가가 모스크바 인근에 소매 체인점을 내기 위해 관리들로부터 137개의 사인을 받아야 했다는 이야기는 푸틴 대통령에게도 보고가 됐지만 이후에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다.
러시아 정부부처로부터 공문에 대한 회신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2주일이 걸린다는 게 한국 업체들의 고충이다. 그래도 받으면 다행이다. 공무원과 약속된 면담이 갑자기 취소되는 일은 부지기수이고 심지어 다른 국가의 공무원들 조차 결국 담당자를 만나지 못한 채 헛걸음만 하고 돌아가는 일이 적지 않다.
러시아 정부 "해결 가능"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러시아 경제개발통상부 게나디 쿠라노프 거시경제분석전망국장은 "사실 2003년 러시아 경제가 6.8% 성장하는 데 있어 석유 의존도는 2%포인트 정도이고 나머지 4.8%포인트는 내수와 외국인 투자에 힘입은 것"이라며 "그러나 석유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작업을 이미 진행하고 있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는 우주항공분야와 기계 및 플랜트 사업, 자동차 산업 등에 중점을 둘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외국인들 뿐 아니라 내국인들도 투자를 확대할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하고 규제도 푸는 등 비즈니스 환경을 조성하고 정책의 일관성도 유지해 갈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모스크바=박일근기자 ikpark@hk.co.kr
러시아속 한국기업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준 진정한 친구, 삼성전자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볼쇼이극장이 최근 삼성전자보다 더 많은 후원금을 내겠다는 한 가전업체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사실이 모스크바에서 회자되고 있다. 삼성전자가 볼쇼이극장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2년. 소련이 붕괴되며 볼쇼이극장이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삼성전자는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던 10만달러를 선뜻 후원했다. 그리고 그 보답은 요즘 100만달러 이상의 가치로 돌아오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GFK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러시아에서 컬러TV, VCR, 전자레인지, 룸에어컨, 레이저빔프린터 등에서 판매량 1위이고 휴대폰에서는 노키아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러시아 시장에서 성공하고 있는 데에는 이러한 보이지 않은 오랜 '문화 마케팅'의 노력이 밑바탕이 됐다.
삼성전자는 특히 현지에 맞는 상품기획으로 시장점유율을 높여왔다. 슬림형 세탁기와 전압 안정형 TV가 대표적인 사례. 집안 내부가 좁은 러시아 실정에 맞춰 슈퍼슬림형 세탁기를 출시한 것이 주효했다. 전압이 들쭉날쭉한 점을 감안, 불안한 전압에도 잔 고장이 없는 TV를 만든 것도 삼성전자이다. 아예 출시할 때부터 노트북PC에 러시아어로 된 프로그램을 깔아 딜러들의 수고를 덜어준 점과 컴퓨터를 구동시킬 때 마이크로소프트 로고대신 러시아 풍경이 뜨도록 배려한 점도 현지화 전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삼성전자 러시아지사의 은주상(사진) 부장은 올해 목표는 러시아 시장에서 소니를 앞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인들에게 '가전업체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업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62%가 소니를, 61%가 삼성이라고 답할 정도로 두 회사는 박빙의 경쟁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러한 과업을 러시아 인재를 적극 활용, 달성하겠다는 복안이다. 사실 모스크바국립대 출신이 대부분인 삼성전자 러시아 직원들은 누구보다 로컬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숨은 주역이다. 은 부장은 "러시아는 무한한 가능성의 시장"이라며 "시장의 트렌드를 따라가는 회사가 아니라 시장의 트렌드를 이끄는 삼성전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일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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