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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16> 도장포 박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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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16> 도장포 박인당

입력
2004.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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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빌려줘도 도장은 빌려주지 않는다.' 도장을 맡기는 행위는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준다는 뜻이다. 한국인이 도장을 얼마만큼 소중하게 여겨왔는지를 말해주는 속담이다. 드물지만 예부터 세교가 두터운 집안끼리는 서로 도장을 바꿔 갖는 풍습이 있었다. 모든 권리와 의사를 대신할 수 있고 재산을 사고 팔 수 있는 권한이 담긴 도장을 교환함으로써 서로의 믿음을 확인하는 미풍인 것이다. 요즘은 서구처럼 서명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그럼에도 도장은 여전히 가장 확실한 증명과 신뢰의 수단으로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개개인의 이름이 새겨진 사인(私印)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신한다. 반세기 가까이 인장공예기능사의 길을 걷고 있는 박호영(朴浩榮·69)씨는 그렇게 믿고 있다.

"도장은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 없는 소중한 물건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처럼 모든 분야에 걸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감제도가 존속하는 한 도장을 만드는 것은 물론 사용하는 데도 신중해야 합니다. 도장을 잘못 찍어 재산상의 손해는 물론이고 법적 분쟁에 휘말리는 불행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박씨의 장인정신은 작업과정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인장공예기능사 1급 자격증을 소지한 그는 '손도장'만을 고집한다. 인장공예기능이 사양직종인데다 그나마 손도장 도장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인격을 반영하는 기물인 도장을 컴퓨터로 만들 수 없다는 게 박씨의 신념이다. 당연히 붓으로 한 자 한 자 써서 조각한다.

"나이가 들어 손으로 도장 파는 일을 할 수 없을 지라도 기계로 도장을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컴퓨터조각은 거의 획일적인 글씨 밖에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나중에 글자를 수정을 한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박씨는 무엇보다 손도장이 위조방지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서울 종로구 관철동의 한 빌딩 지하 1층 4평 공간의 박인당(博印堂), 여기서 그는 나이도 잊은 채 조각도와 씨름하고 있다. 비록 도장포에 불과하지만 상호에는 '도장의 명가'라는 자부심이 배어 있다. 조각도를 드는 순간 자세는 달라진다. 손님의 인격이 자신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 때문이다.

"도장에도 명품이 있습니다. 훌륭한 재료에 장인의 서법과 도법 등 여러 요소가 어우러져야 길상인(吉相印)이 태어납니다." 도법은 조각도 구사능력을 말한다. 마치 서예가가 붓으로 글씨를 쓰되 운치가 생명을 좌우하듯, 그런 멋이 우러나오도록 글자를 인면(印面)에 조각해야 한다. 인면은 글자를 새기는 부분이다. 간혹 성명학의 수리론도 적용한다. 이름자의 획수에 따라 길흉이 달라진다는 이론인데 불행을 예방하는 의미에서 이름 석자에 '印' '章(장)' '信(신)' 등의 글자를 추가한다. 수리론을 절대적으로 신봉하진 않지만 손님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서다. 법인인감의 경우 글자가 많으면 꼬박 하루가 걸린다. 일반적인 법인인감의 인면은 직경 18mm 크기다. 그 공간에 24자까지 새겨 넣을 수 있다.

도장의 재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상아나 물소뿔이 일반적이다. 벼락맞은 대추나무인 벽조목은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의 효험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높이 평가를 받지만 구하기 무척 어렵다. 국산으로는 춘천에서 생산되는 춘천옥을 으뜸으로 치는데 부가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도장재료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박씨는 10대 후반 서예가이자 전각가였던 김두칠(金斗七)의 문하에 들어 전통인장예술의 기초를 닦았다. 함경남도 신흥군이 고향인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서당수학마저 중단해야 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한국전쟁중 어머니와 함께 남하한 그는 어려서 익힌 조각솜씨로 도장을 파주고 쌀 됫박이나 얻어 허기를 달랬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 일성당에 점원으로 들어가 스승을 만난다. 60년대 초 좌판으로 영업을 시작, 몇 년 뒤 중구 다동에 도장포와 인쇄업을 겸한 예문사를 차렸다. 그러나 인쇄분야의 경험이 없어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78년 박인당의 상호를 내걸고 도장포 일에만 매달렸다. 박인당을 찾아주는 손님 모두가 고맙다고 밝힌 그는 특히 동부화재에 감사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동부화재는 총각시절부터 40년 동안 거래를 해온 단골이다.

박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였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인수(槿域印藪) 등 옛 문헌이나 자료를 보고 서법과 도법을 연구해왔다. 근역인수는 조선 초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화가와 문인학자들의 날인된 인장을 모은 자료집이다. 그 덕분에 전각(篆刻)에도 상당한 실력을 갖추게 됐다.

"요즘 젊은이들이야 누가 도장을 파려고 하나요. 제 자식도 외면하는데. 다행히 20년 전 제자를 한 명 두게 됐습니다. 춘천에서 박인당의 이름으로 점포를 운영하고 있는데 같은 상호를 쓰겠다고 해서 말리지 않았습니다."

방촌(方寸)이라는 말이 있다. 사방 한 치란 뜻으로 본디 도장을 가리키지만 그보다는 마음 또는 흉중의 의미가 더 강하다. 남들은 대지를 방촌에 품는다고 하지만 박호영, 그는 인각(印刻)의 업을 천직으로 삼은 장인이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권위·비밀·소유의 상징

"추사의 글씨를 가지고 하는 말이 '추사의 글씨를 방불케 하는 것으로 솜씨는 도리어 추사보다 능숙한 데가 있어 보이나, 도장이 추사 것이 아니니 아무 가치 없는 것'이라는 말을 하더란다."(계용묵의 '낙관'중에서) 여기서 도장은 서화의 진위를 판명하는 근거로 기능하고 있다. 인장(印章)으로도 불리는 도장(圖章)이 권위와 권능, 비밀의 상징, 합법적 소유의 상징으로 쓰인 것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비슷하다.

단군의 건국과정에 등장하는 천부인(天符印)은 하늘이 전한 도장으로 신령스러움을 상징한다. 삼국유사의 이 기사는 도장에 관한 한국 최고(最古)의 기록이다. 성서에도 신의 권능이 도장을 찍는 행위로 나타난다.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의 구절이 좋은 예다. 기밀 유지를 위해 사용된 도장이 봉니(封泥)다. 종이 발명 전 죽간이나 목간에 기록한 내용을 묶어 점토를 붙이고 그 위에 도장을 찍었는데 이는 바로 믿음과 기밀보전의 의미를 갖는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에선 국왕이 바뀔 때 국새를 전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고려 성종 때 서류에 도장을 찍은 최초의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당시 토지측량을 맡은 관리인 양전사(量田使)가 병사하는 바람에 김수로왕 능묘에 소속된 전답의 토지대장에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는 기록이다. 또 인부랑(印符郞)의 벼슬이 있어 나라의 인장을 관리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1년(1392년) 상서원(尙瑞院)을 설치, 어보 등을 관장했다.

도장은 기원전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원시문명사회에서 처음 사용됐다. 이를 도장의 효시로 삼는다. 중국은 진시황이 통일국가를 세운 뒤 옥으로 도장을 만들면서 옥새라고 불렀다. 이후 일반 신민의 도장은 인으로 칭했다. 서구에선 18세기 이후 자서의 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도장은 점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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