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성공한 감독을 만나면 막 뜨기 시작한 연예인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시쳇말로 '바람'이 들어 보인다. '쉬리'의 강제규 감독도 한때 그랬다. " '쉬리' 끝나고 좀 반드르르 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인생에 그럴 때가 한번쯤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만난 강제규(41) 감독은 '쉬리'의 성공 직후 일로번창하던 사업가 강제규가 아니라 50여일 씩 편집실에 박혀 지내는 꾀죄죄한 감독이었다. 비로소 그가 있어야할 곳에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역시 현장에 있는 감독을 보는 게 더 편안하다.'쉬리'와 블록버스터
'한국에서도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가 가능하다'는 벅찬 자신감을 안겨준 '쉬리'. 그러나 '쉬리'가 누린 영광의 시간은 짧았다. 남북 문제를 다룬 좀 더 진보적인 시각의 '공동경비구역 JSA'는 평단의 찬사를 독차지했고, 향수를 자극하는 '친구'는 8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 흥행 신기록을 세웠다. '쉬리'는 그저 '히트했지만 내용은 깊지 못했던 영화'로 인식될 뿐이다.
"사실 '쉬리'를 만들 때는 그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도 알지 못하고 그저 열심히만 찍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잘 만들었더라 (웃음). 분명 어떤 벽을 뛰어넘게 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그 영화는 이야기의 골격이나 우리 영화 풍토에서 그것이 최고일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쉬리'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강제규 감독은 '단적비연수' 같은 판타지 사극 제작에 도전했고, 결과는 참패였다. "블록버스터는 폭풍처럼 사람을 몰아치고 마비시키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영화에는 그런 힘이 없다. 영화의 사이즈는 작고 드라마는 부실하다. 블록버스터의 곁가지만 잡고 있는 느낌이다. 진짜 총 들고 쏘고 이러는 게 블록버스터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 감독이나 제작자가 처음하는 것이니 스스로 마취된다. 이런 정도면 대단하다, 식으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다시 블록버스터에 도전했고, 앞으로는 판타지에 또 다시 도전해볼 생각이다. '은행나무침대'와 '쉬리'는 그의 긴 여정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쉬리'와 '태극기 휘날리며'
극장에서 '태극기 휘날리며'의 예고편을 본 관객이라면, 강제규 감독이 '쉬리'를 능가할 '사건' 하나를 만들어낼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편집할 때 한번 울고, 사운드 입히며 또 운다"는 식의 소문이 돌 만큼 제대로 '울려준다'는 얘기인데….
"아, 그거 예고편이 다지 뭐." 감독이 이렇게 '여유' 있게 맞받아치는 걸 보니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디지털의 힘을 느꼈다. 예고편 곳곳을 디지털로 색과 명암을 강조하니 '때깔'이 다르더라. 디지털은 작업에 시간이 너무 많이 들지만, 그만큼 효과는 정직하다." 미국서 수입한 각종 총포류로 실감나는 전장을 연출하고, 여기에 디지털 옷을 입히느라 순제작비만 146억원이 들었다.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제작비다.
일단 맛보기만 본 영화는 때깔도 좋고, 세계 각국 기자들과 배급자를 초대하는 '월드 프리미어' 행사를 기획할 만큼 마케팅도 블록버스터급이다. 문제는 내용. 감동도, 눈물도, 웃음도 없는 '블록버스터' 때문에 상처를 입은 관객들은 큰 영화가 '무섭다'.
"화면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자신감이 든다. 한국전쟁을 다루며 역사에 너무 휘둘리지 않았을까, 혹은 역사를 너무 피상적으로 다루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는 것을 안다. 나는 그냥 웰메이드 전쟁 영화를 한 편 만들어 보고 싶었다. 자료를 조사하다 한국전쟁의 본질로 빠져들게 됐다. 역사가 나를 가르쳤다."
한국전쟁의 전장에 투입된 두 형제(장동건, 원빈)의 갈등이 1951년 가을까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아직 스무살이 되지 않은 동생을 보호하고 싶은 형은 자꾸만 전쟁광이 되어가고, 동생은 그런 형을 보면서 그게 형의 사랑인지, 광기인지 의심하게 된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 하나가 끼어 들면서 영화는 상업 영화로서의 흥미진진한 구성을 갖추게 된다는 설명이다. "전쟁 자체가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거기에 형제의 스토리를 얹는 것만으로도 극적 분위기가 연출됐다"는 감독은 자꾸 자세한 '선전'을 하기를 꺼렸다. "영화로 말하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군 면제자인 장동건과 아직 군에 가지 않은 원빈이 과연 전쟁터에 내던져진 주인공의 내면을 얼마나 잘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한 2주 뺑뺑이 돌리면 꽃미남이고 뭐고 없다"던 당초의 자신감이 여전할까. "전쟁터같은 현장을 만들어 주니 그냥 눈빛이 생생해 지더라"는 게 감독의 말이다. "잘몰라서 그렇지 장동건, 원빈 둘 다 연기를 잘 한다. 원빈은 자기 연기에 대한 집중력이 강하고, 장동건은 주변 정황까지 살필 만큼 이젠 노련해졌다. '쉬리' 때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주문을 많이 했지만 이번에는 분위기만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까 연기가 저절로 나오더라."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충무로의 '양강'(兩强·강우석 강제규)이 역사를 주제로 대작을 만든다는 건 이미 지난해부터 커다란 화제였다. 드라마에 강한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 볼거리에 강한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의 대결. 보이지 않는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두 감독의 속내는 어떨까. 강 감독은 "자꾸 우리 두 사람을 비교하지만, 확연히 다른 영화를 만든다"며 '대결 구도'를 깨려고 한다. "나는 자꾸 엉뚱한 상상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서 실제 상황이라는 리얼리티를 다루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그것은 노련한 강우석 감독이 할 일"이라며 차이점을 강조했다. 강우석 감독 역시 다른 자리에서 "예전같으면 안 그랬을 수도 있지만, '태극기…'가 진짜 잘 돼야한다"고 말했다. 같은 날 개봉해서 서로 피해를 주는 상황을 만들지 말자는 것도 두 감독의 사전 교감의 결과였다. '실미도'는 예정보다 다소 빠른 구랍 24일 개봉했고, '태극기…'는 2월6일 개봉한다.
한국 영화계에 '블록버스터' 바람을 몰고 온 강제규 감독. 그가 '태극기 휘날리며' 한 편으로 자신의 공로와 자신으로부터 촉발된 부작용까지 한꺼번에 모두 넘어설 만한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 올 영화계의 첫 번째 숙제이다.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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