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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29> 노래하는 마흔 살 철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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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29> 노래하는 마흔 살 철부지

입력
2004.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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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어릴 때 나는 변소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수세식 화장실도 아닌 재래식 변소에서. 그럴 때마다 언니들은 나를 놀리곤 했다. 친구들도 함께 모여 앉아 놀 때면 언제나 "박정자, 노래해"라고 아우성이었다. 자리만 있으면 박정자는 남들 앞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돼버렸다.'위기의 여자'가 끝난 후 나는 우연히 여의도에서 남편의 후배인 이종명을 만났다. 광고 쪽 일을 하던 그는 나를 보고 대뜸 "제가 녹음실 하나 가지고 있는데 반주 넣어 놓을 테니 노래하세요, 형수님 왜 노래하기 좋아 하시잖아요"라고 했다. 그의 제의가 참 재미있었다. 그러고 싶었다. 그의 녹음실에 갔더니 그는 아예 레코드를 하나 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말도 안돼, 내가 판을 내면 동네 강아지도 판을 내겠다. 어림 반의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정색을 했다. "무슨 소리예요? 괜찮아요!"

그때 나는 문득 '연극을 통해 많은 관객과 만났지만 뭔가 다른 채널,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좋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그 또한 서비스라고.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기대로 가득찬 멍청한 얼굴로 그의 의견을 구했다. 그는 내가 평소 좋아하는 노래 몇 곡을 부르고, 노래 두세 곡은 작곡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 한 번 해보고 싶어. 넘어진 김에 쉬어가는 거지 뭐.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갔다. 늘 내 주위엔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고은정 선배가 노래말을 써주고 작곡을 의뢰하고…. 이윽고 소위 레코드판이라는 게 나왔다. 그러나 부끄러웠다. 가수도 아닌 내가 판을 내는 게. 시 낭송 테이프를 하나 더 내면 이 부끄러움이 상쇄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레코드의 소비자일 것으로 예상되는 중년 여자들의 취향을 생각해 프레베르의 '아침식사', 칼릴 지브란의 '내영혼이 나에게 충고했어', 헤르만 헤세의 '안개 속에서' 같은 시를 골랐다. 음반 제목은 '아직은 마흔 네 살'로 정했고, '위기의 여자' 맨 마지막에 나오는 다이얼로그도 실었다.

지진은 또 한 번 남아 있었다. 이종명은 책이 나와도 출판기념회를 하는데 음반이 나왔으니 어찌 발표회를 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나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체면이고 염치고 다 내던졌다. 그래, 하지 뭐. 나는 동숭아트센터 대극장을 하루 빌리기로 했다.

무대 위엔 겨울 나목을 한 그루 세웠다. 바람을 일으켜 낙엽을 날리고 펑펑 함박눈도 쏟아지게 했다. 피아노, 아코디언, 기타 반주. 나는 결혼하던 날보다 더 흥분했다. 그건 내 인생 최대의 호사 같았다. 그날 동숭 아트센터에는 700명이 와 주었다. 600석의 극장이었는데, 나는 검정 벨벳 드레스와 올리브 그린색의 쉬폰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었다.

그 무대에서 나는 노래를 불렀다. 박자도 심심찮게 틀려가면서…. 내 노래에는 무반주가 더 잘 어울리지만 관객들은 내가 실수하기를 더욱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위해 나는 맛있는 음식도 마련했다. 그리고 그날 무대에는 강부자, 한영애, 장미화, 진성만씨도 나와 노래를 불러줬다.

가끔 나는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웃음이 난다. 참 배짱 한번 좋았어. 뻔뻔스럽기까지 했지. 그러나 그때 내가 주저했다면 그런 해프닝은 평생 없었을 거고, 잔뜩 후회를 했을 테지. 나는 기회란 증발해 버리는 것이며, 바로 그 순간에 주저하면 다시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렇게 일을 저질렀다. 수습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모험도 기회라는 걸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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