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너무 자세히 우리 산천을 기록한 죄로 지도는 불태워지고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이다. 김정호는 지도를 만든 공로로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을 얻었고, 지도도 불태워진 적이 없다.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졌을 것 같은 지방 수령의 살인사건 판결도 부검부터 판결까지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처럼 조선왕조는 기록을 중시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봐도 알 수 있다. "왕이 부스럼이 나서 등을 박박 긁었다"는 아주 사소한 내용까지 기록했다.부끄러운 우리 기록문화의 현실
오랜 전통을 가진 우리의 기록문화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명맥이 끊겼다. 김정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이 고의적으로 우리의 기록문화를 폄하한 경우도 있었지만 정부차원의 무관심도 컸다. 정부기록보존소는 건국 21년 만인 1969년에야 세워졌다. 태종이 조선 건국 9년 만인 1401년 실록편찬 준비를 위해 예문관 설치를 명한 것과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 차이다.
폐해는 심각했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협의회의 김은식 사무국장은 "정부에 피해자 실태에 관한 체계적 자료가 없어 일본에서 입수해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2000년에 이르러서야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이 공포돼 정부기록에 대한 체계적 정비가 시작됐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한 정부 부처의 김 모 과장은 "글자크기만 틀려도 다시 써야 할 정도로 공문서는 엄격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보내는 문서의 체계적 보관과 관리가 문제다. 지난해 참여연대 정보공개사업단은 정부기관이 기록물을 무단 폐기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행정자치부를 비롯한 정부기관에서 10년으로 정한 '보존기간표'를 어기고 5년 만에 기록들을 폐기한 것이다.
최고통치자인 대통령의 기록에 관해서는 더욱 문제가 심각했다. 정부기록보존소는 지난해에야 겨우 건국 이후 최초로 대통령 기록을 체계적으로 인수, 보존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관련 자료는 15만8,000여건으로 건국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의 기록 12만여건보다 많을 정도다. 물론 이 둘을 다 합쳐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관련 자료보다도 적다. 대부분 임기 말에 불리한 자료를 폐기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기록문화의 폐해들
정부기관은 뒤늦게나마 법률 제정을 통해 기록문화를 조금씩 정착시켜 가고 있지만 민간 분야는 아직 기록문화에 대한 인식 자체가 낮은 편이다. 지하 매설물 기록이 부실해 생긴 대구지하철 가스폭발사고(1995년), 형식적인 안전점검 기록이 자아낸 씨랜드 참사(1999년)에서 볼 수 있듯 기록의 부재와 왜곡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빚기도 한다.
지하철 1호선의 경우도 설계도면이 없어서 환풍기를 교체하는데 천장 전체를 뜯어내기도 한다. 건축 엔지니어 김병기씨는 "건축현장에서는 문서보다 말을 선호한다. 문서를 쓰면 나중에 잘못될 경우 책임을 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록과 실제가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대우사태와 최근 SK사태에서 볼 수 있듯 왜곡된 기록인 분식회계는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친다. 고악보를 연구하는 남상숙 원광대 국악과 교수도 "악보가 있다는 자료를 보고 문화재청에 갔더니 기록상에만 악보가 있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의 경우도 문제가 심각하다. 지난해 경기도의 문서 보관율은 10%대에 머물렀다. 2년이 지난 문서를 보관할 곳이 없어서 담당 공무원이 집에 보관하는 경우도 있었다. 독일의 경우 주마다 기록보관소를 설립하도록 의무화돼 있다. 이에 대해 박찬승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는 "현재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지방자치단체 기록까지 관리하는데 정부기록보존소를 국립기록관리청으로 승격시키고, 광역자치단체에 지방기록보존소를 설립해 그 지방의 기록을 보존하게 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바람직한 기록문화를 위한 제안
박원호 기술사는 '다시 세우는 건설문화'라는 글에서 "건설현장에 왜 실패의 기록이 없는가"라고 묻는다. 실패를 하면 문책을 당하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정보공개를 공언했지만 관련 부처의 치적에 관한 것이 주로 공개될 뿐 정작 국민들이 원하는 기록은 공개를 꺼리며 지금도 심심찮게 공개요구 소송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일방적인 미화보다 부끄럽고 가슴 아프지만 솔직한 기록이 후대에 더욱 빛을 발한다. 소설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이 1급 사료로 평가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말하고 싶은 업적, 남기고 싶은 업적만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그 기록의 솔직성과 정확성 때문이다. 정확한 기록을 위해 왕에게 불리한 사실을 적더라도 왕이 사관에게 고칠 것을 지시할 수 없었고 애초에 기록을 열람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틀을 지켰다.
사람의 기억에 의존하는 사회풍토도 바뀌어야 한다. KBS 교향악단에 5,6년 전의 연주기록을 문의하면 "담당자가 많이 바뀐 상태여서"라는 대답이 돌아오기 일쑤다. 담당자가 사라지면 기억도 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기록 자체 뿐만 아니라 체계적 기록의 관리와 보존이 중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보관만 되어 있고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은 기록도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민간과 기업차원에서의 기록문화도 되살려야 한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기록을 중시했다. 이를 토대로 일상사를 재현할 수 있을 정도다. 일본은 1930년대 미쓰비시에서 기업기록을 체계적으로 남겼다. 우리도 선조의 기록문화를 되살려 정확하고 진솔한 기록을 남기는 풍토를 정착시켜야 할 때다.
/홍석우기자 muse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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