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주 MBC 해설위원이 쓴 'e-비즈, 생존의 법칙'이라는 책을 읽다가 세계 경제계 명사들의 클럽인 다보스 세계경제 포럼 2000년 총회에서 미국 소니사 회장 하워드 스트링거가 했다는 말이 영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21세기 디지털 다윈주의' 체제하에서 기업이 살아 남기 위해 벌여야 할 혈투에 대해 수많은 말이 오고 간 뒤에 스트링거는 이렇게 말했다나."이 같은 말들을 들어보면 바로 지옥을 묘사하는 것 아닙니까? 모두가 쉬지 않고 살아 남기 위해 경쟁하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면 언제 성생활을 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습니까? 차라리 지구에서 내리고 싶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세계 경제계 거물들이 모두 스트링거의 말에 공감했다고 한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체제의 신경제가 사람들의 피를 말리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간 수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해온 이야기였지만, 그 처절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최정상에 선 사람들마저 지구에서 내리고 싶다는 푸념을 한다는 게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한국처럼 자원이 빈약하고 해외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어쩌란 말인가? 일자리가 줄어드는 게 일시적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더욱 심화될 구조적 문제라는 건 이미 보통사람들도 깨닫고 있는 듯 하다.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도 말장난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 아닌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직장에서 가장 많이 퇴출 당한 근로자는 30대였으며, 남성의 '화병(火病)'이 크게 늘었다는 보고도 나오고 있다.
신용불량자가 350만 명을 넘어서자 이젠 미국의 컨설팅 회사까지 나서서 한국 가구의 40%가 빚 갚을 능력이 없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신문들은 <쫓고 쫓기는 '빚과의 전쟁'> , <서민가계 '파산위기' : 밥 먹기도 힘든데… 세금 공과금 체납 속출> 등과 같은 제목의 기사들로 그런 현실을 알리고 있다. 서민가계> 쫓고>
출산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바로 그런 경제의 문제와 그에 따른 생존경쟁의 방식이다. 한국 출산율은 1.17로 이미 세계 최저수준을 기록하였지만, 반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최근 이화여대 학보의 조사에 따르면, 이대생의 30%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답했다. 자녀 양육과 교육에 대한 경제적 부담 탓일 게다. '자아실현이 우선'이라는 답도 나왔지만, 이것 역시 그런 부담을 염두에 둔 판단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11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승권 사회정책연구실장이 발표한 '자녀 양육 및 비용 부담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구당 월 소비지출의 57%가 자녀 양육비로 지출되며 이중 60%가 사교육비를 포함한 교육비로 쓰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에서 내리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도무지 비전과 전망이 보이질 않으니 지구에서 내리는 것 이외에 무슨 대안이 있겠는가.
이는 전 지구적 추세이니 우리로선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우리 스스로 우리에게 적합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기대 수준을 낮추고 작은 것에 만족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삼고 있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2004년 새해엔 그런 잘못된 자세부터 바꿔보자.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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