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우리 문화계는 어디로 흘러갈까. 문화 생산자들은 한 해를 예측하고 '새 상품'을 기획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출판 학술 영화 방송 가요 등 문화계 각 분야의 굵직한 흐름을 보여줄 6개 키워드를 통해 올 우리 문화계를 전망한다.
일본 출판계는 최근 한국 출판의 경향을 '한국의 재발견'이란 말로 요약했다. 그 동안 눈길을 끌지 못했던 '일상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 부각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출판뿐만 아니라 영화 방송 등 대중문화에서도 정치, 전쟁, 외교, 국가, 혁명 등 거대 담론 대신 도박, 요리, 사생활 등 지극히 일상적이고, 흔히 무시되거나 지나쳐 온 이야기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주류보다는 비주류, 공식보다는 비공식, 영웅보다는 범인(凡人)의 모습을 통해 역사의 실마리를 잡아내려는 노력은 단순한 관점의 전환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과거를 바라보는 의식의 혁명으로까지 평가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우선 출판계에서 뚜렷하다. 'IMF 위기' 때보다도 극심했다는 불황을 겪은 지난해 '생활사' '미시사' 관련 책들은 출판계의 희망의 빛이 됐다.
제44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저술(교양) 부문의 유력한 수상 후보작이었던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지음, 푸른역사 발행)이 좋은 예다. 이 책의 소재는 도둑과 깡패, 노름판과 술집, 상놈들의 생활, 폭력배와 색주가 등이다. 저자는 조선 사회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눈여겨볼 만한 현장은 빠짐없이 돋보기를 들이대고 이면을 뒤져 일상을 복원했다.
올해에도 강 교수는 18세기 지식인의 내면 세계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책을 내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있다. 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 (고미숙 지음) 등 고전 다시 쓰기로 관심을 모은 '리라이팅 클래식'(그린비)과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정창권 지음)를 낸 사계절의 '작은 역사' 시리즈의 후속작도 기대된다.
지금까지는 한문학자나 국어학자 등이 중심이 된 이런 시도에 점차 역사학자들이 가세할 경우 '역사물 전성시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올 만하다.
지난해 영화 '스캔들'과 '황산벌'은 사극 영화의 핵심이 왕조 사극, 고증 사극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의 사극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증명했다.
'스캔들'은 '조선 시대에도 요즘과 같은 명품족이 살았다'는 가정 하에 자료를 수집하고 상상력을 덧붙여 조선 시대 귀족의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옷, 화장, 먹거리는 '조선=유교적 절제미' '조선의 남녀 관계는 남녀 7세 부동석'이라는 식의 고정된 관념을 깨뜨렸으며, '새로운 시각으로 본 과거'의 얘기 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황산벌'도 마찬가지. 김유신 계백 관창 등 역사적 인물의 영웅주의가 아닌, 그들 내부의 고민과 번민, 웃음을 잡아냄으로써 박제된 역사 인물이 아니라 과거 속에서 살아 숨쉬었던 인간을 그려낸 것이 특징이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식으로 접근한 임권택의 '춘향뎐' 등과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올해도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인 박경원(1901∼1933)을 주인공으로 한 '청연', 극진공수도 창시자인 무술인 최배달의 일대기를 그린 '바람의 파이터',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그린 '역도산', 혁명가 김산을 주인공으로 한 '아리랑' 등이 영화로 만들어진다.
또 프로야구 원년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활동한 패전 처리 전문 투수를 주인공으로 한 '슈퍼스타 감사용', 대통령의 이발사를 다룬 '효자동 이발사' 등 20세기 초부터 1980년대 인물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새롭게 되살아나 근·현대사 인식의 공백을 메워줄 것으로 보인다.
방송도 다르지 않다. 사극의 접근 방식을 바꿔 놓은 '대장금'에 이어 MBC는 올해에도 5월을 전후해 우리나라 경제 개발의 주역이었던 재벌과 전문 경영인의 이야기를그린 100부작 경제드라마 '영웅시대'를 방송한다.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 등 재벌 및 이명박 등 재계 인물의 실화를 토대로 현대 경제사를 복원한다.
SBS도 5월부터 시작하는 '장길산'을 통해 조선시대 하층민의 생활 재현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며 KBS가 '무인시대' 후속작으로 준비 중인 '이순신'에서는 이순신의 인간적 고뇌와 함께 조선조 병영 풍경 및 병사들의 모습이 실감 나게 그려질 전망이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최진환기자 choi@hk.co.kr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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