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년 새해가 밝았다. 극단적인 갈등과 분열, 그리고 정치적 이변으로 점철되었던 2003년을 보내면서 언론사 등 여러 기관들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국민들이 새해 대통령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단연 '경제문제'였다. IMF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연말 경기가 실종되다시피 하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대통령 또한 신년사에서 올해는 '정치개혁의 원년'인 동시에 '서민들도 경기 회복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해 이에 화답하는 듯이 보였다.그러나 경제라는 화두에 우리가 다시 전념할 수 있으려면 아마 빨라야 올 하반기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전례 없는 물갈이가 예고되고 있는 총선이 불과 석 달 남짓 남았고, 대선자금 수사는 아직 종결되지 않았으며, 측근비리 수사결과 발표에 이어 특검이 기다리고 있고, 한나라당의 내분이라는 불씨가 다시 맹렬하게 타 들어가기 시작했고,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입당에 이어 청와대와 당이 합작한 총선 태스크 포스가 구성될 것이라는 뉴스까지 나온 걸 보면 경제 이야기는 적어도 당분간 새해 덕담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노무현 정권 출범 1년 동안 많은 국민들은 대통령이 걸핏하면 자신의 직을 걸어가면서 깜짝 발언을 되풀이하기 보다는 차분히 경제를 살리는데 전념해주기를 고대해왔다.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대통령의 생각은 이와는 많이 달랐던 것 같다. "못 해 먹겠다"에서 "재신임"을 거쳐 "10분의 1"까지 나왔다. 동시에 온 국민의 공분을 자아냈던 한나라당의 차떼기 선거자금에 이어 대통령 측근 비리 또한 그간의 해명을 무색케 하는 충격적 결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 국민치고 정치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나간 대선자금 파헤치기보다는 경제 살리기를 원했던 국민들의 생각은 아마도 이런 것일 게다. "과거 한국의 정치 환경에서 정치인이라면 '털어서 먼지 안 날' 도리가 없었던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 마침 상대적으로 깨끗하리라고 인정할 수 있는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으니 털어서 먼지 날 것이 뻔한 대선자금만 자꾸 털 것이 아니라 당장 급한 경제현안을 해결하면서 정치개혁은 좀 덜 충격적이고 비정파적인 방법으로 해주었으면 좋겠다." 앞서 언급한 여론조사 결과도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대통령의 생각이 최선이었든 차선이었든, 그는 정치개혁의 의지를 천명하면서 여기까지 왔고 이제 그것을 되돌리기에는 그 동안의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 두 갈래 길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는 것은 갈림길 입구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이미 한 길을 택하여 멀리 와버렸다면 좋든 싫든 여기서 무언가 결과를 보아야 한다. 한 마디로 올해 우리 모두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셈이다.
이제 중간에 내리는 방법은 없다. 어설프게 내리다간 정치개혁은 일개 정파의 꼼수 수준으로 전락하게 되고, 우리 모두는 호랑이에 물려 죽거나 최소한 중상이다. 반면 이 비상한 상황을 잘 관리하면 평상시에는 이룰 수 없는 일을 이룰 수 있다. 바로 '돈 정치'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노 대통령은 설사 자신의 10분의 1 발언에 의해 하야하게 되는 최악의 경우를 맞더라도 역사에 위인으로 남을 것이다.
'경제 우선'을 원했던 국민들도 더 큰 경제적 낭패를 원치 않는다면 두 눈 부릅뜨고 정치개혁을 감시해야 한다. 대통령은 호랑이 등에 타기를 원치 않았던 대다수의 국민들에 대해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더 이상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고 '우리는 덜 나쁘다' 식의 어정쩡한 논리나 '말조심·글조심' 같은 막말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많은 경제적·사회적 비용을 치러가면서 추진해온 정치개혁을 100% 원칙대로, 그리고 비정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에 국가의 명운이 걸려 있다.
장 덕 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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